[춘추관에서] ‘文의 친구’ 노무현 vs ‘盧의 선물’ 문재인

by김성곤 기자
2018.05.15 06:00:00

1982년 盧·文운명적 첫 만남…인권변호사로 민주화운동 헌신
盧, 청문회 스타 이어 지역주의 도전 거쳐 기적의 대선승리
文, 친구에서 靑참모로…盧 서거 이후 정치입문과 대선승리
‘사람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다’ …운명으로 엮여있는 두 사람

실내행사장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는 노무현 의원과 문재인 변호사(사진=노무현재단)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다시 5월입니다. 2009년 5월은 누군가에게 눈물조차 흘리지 못할 정도로 슬펐던 시절입니다. 2017년 5월과 2018년 5월은 만약 또 다른 그 누군가가 살아있었다면 너무나도 기뻐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와 또 다른 그 누군가는 36년 전인 1982년 운명처럼 만났습니다. 생면부지의 남이었지만 둘은 잘 통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동지로 뜨거운 시대를 함께 했습니다. 6살의 나이 차가 나는 선후배였지만 ‘친구’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2003년과 2017년 각각 14년의 시차를 두고 나란히 대한민국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바로 노무현과 문재인입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돌베개)와 ‘문재인의 운명’(가교출판)을 참고해 두 사람의 인연을 정리해봤습니다.

1975년 3월 제17회 사시에서 ‘고졸’ 합격자가 탄생합니다. 그는 “벌레가 사람이 된 것만큼이나 큰 사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훗날 회고에서도 대통령 당선보다 더 기뻤다고 밝혔습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대전에서 짧은 판사생활을 마쳤습니다. 부산에서 개업한 뒤 세속의 변호사로 잘 나갔습니다. 승소율도 높았고 돈도 잘 벌었습니다. 1981년 9월 ‘부림사건’을 만나며 인생이 뒤바뀌었습니다. 구타와 고문으로 초췌한 젊은 청년들을 접견한 뒤 “분노로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노무현입니다. 1982년 인생의 동지이자 친구로 부르게 되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모르는 사이였지만 곧 의기투합했습니다. 노무현의 기억에 그는 정직하고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1980년 5월 서울의봄 당시 구속된 한 경희대생이 서울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사시 합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19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전략 탓에 판사에 임용되지 못했습니다. 변호사로 방향을 바꾸자 ‘김앤장’을 비롯해 유수의 로펌들이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에 나섰지만 모두 거절합니다. 보통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하고 부산으로 낙향합니다. 사법고시 동기의 소개로 부산 부민동에 위치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갑니다. 그는 문재인입니다. 그 곳에서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한 사람을 만납니다. 나이 차도 적지 않고 고시도 5년 위의 대선배였지만 상대는 깍듯한 높임말로 존중해줬습니다. 문재인의 기억에 그는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한 사람이었습니다.

1987년 6월 18일 부산 민주항쟁 시위중 부상으로 사망한 고 이태춘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부산 거리를 행진하는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 등 부산지역 민주인사들과 시민들.(사진=노무현재단)
시국사건인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을 변호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입니다. 대학 운동권 새내기처럼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부산에서 6월항쟁을 주도했습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사람사는 세상’을 선거구호 내걸었습니다. 당선 이후 치열한 의정활동으로 ‘청문회 스타’가 됐습니다. 주먹을 불끈 쥔 오른팔을 들고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고 3당합당 반대를 외치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이후 기나긴 좌절의 연속입니다. 지역주의에 도전했지만 벽은 높았습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를 버린 채 모두의 반대 속에 부산 출마를 고집합니다. 또 실패였습니다.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노무현입니다.

친구를 국회로 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 일이 많았지만 삶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꼭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는 목표는 없었지만 어느덧 부산경남을 대표하는 노동·인권변호사가 됐습니다. “젊은 나에게 영감님 호칭은 거북하다. 앞으로 변호사로 불러 달라”고 직원들에게 말할 정도로 소탈했습니다. 독재정권에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골프도 배우지 않았고 폭탄주도 멀리 했습니다. 1995년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고 노동운동 지원에 집중했습니다. 사실상 80·90년대 부산경남 지역의 노동관련 소송은 혼자 도맡았습니다. 큰돈을 벌지는 못했습니다. 연이은 낙선으로 어려웠던 친구의 정치활동을 직간접적으로 도왔습니다.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바보 노무현’의 기적을 도왔습니다. 그는 문재인입니다.

2007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노무현재단)


2002년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꺾었습니다. 그러나 지방선거 참패 후 지지율이 곤두박질쳤습니다. “대통령 자질이 없다” 노골적인 후보교체론도 나왔습니다. 2002년 11월 2일 부산선대위 발족식에서 격정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나이는 적지만 믿음직한 문재인을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 감이 됩니다.” 정몽준과의 단일화와 대선 전날 파기라는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청와대 생활 5년은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대북송금 특검, 열린우리당 창당, 재신임, 탄핵, 국가보안법 폐지, 이라크파병, 대연정, 수도이전 위헌, 종부세, 한미 FTA, 개헌, 남북정상회담 등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집권 내내 ‘경제를 망친 대통령’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MB집권의 일등공신이라는 조롱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는 노무현입니다.



‘친구’라는 표현은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2002년 대선 당시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준 후배에 대한 고마움이었습니다. 사실 정치는 늘 불편한 옷이었습니다. 13대 총선에 이어 2002년 부산시장 선거와 2004년 총선 출마도 거절했습니다.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도 “민정수석으로 끝내겠다”,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라는 다짐 끝에 받아들였습니다. 청와대 생활 1년 만에 치아 10개를 뽑았습니다. 17대 총선 직전인 2004년 2월 네팔로 건너갔습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에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고교 때부터 피워온 담배도 끊었습니다. 현지에서 대통령 탄핵안 발의 기사를 접하고 귀국했습니다. 운명의 끈은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탄핵 기각 이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복귀했습니다. 다시 민정수석으로 일했다가 2007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았습니다. 친구에서 참모로 청와대 생활을 5년을 고스란히 함께 했습니다. 그는 문재인입니다.

손녀를 태우고 봉하벌판을 달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사진=노무현재단)
퇴임 이후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야∼ 기분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화양연화(花?年華). 그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청와대를 떠나올 때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낙인에 시달렸지만 고향은 따뜻했습니다. 국민들도 박수와 웃음을 보내줬습니다. 야당과 일부 언론의 ‘아방궁’이라는 비판에도 사저로 몰려드는 방문객들은 날이 갈수록 늘었습니다. 모두들 집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낮에는 방문객 인사를 하느라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녀와 자전거를 타거나 마을 쉼터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상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외출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2009년 4월 30일 대검찰청으로 생애 마지막 외출을 했습니다. 5월 23일 모든 것을 내던졌습니다. 그는 노무현입니다.

봉하마을과 가까운 경남 양산에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몇 달간 외출하지 않고 마당을 돌보고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가끔은 봉하마을에도 들렀습니다. 2009년 5월 23일 새벽부터 전화 벨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실장님, 저 경수입니다. 지금 빨리 와주셔야겠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던 하루였습니다.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게 후회됐습니다. 시신확인에 이어 서거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대단히 충격적이고 슬픈 일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오늘 오전 9시 30분경 이곳 양산 부산대 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봉화산 바위에서 뛰어내리신 것으로 보입니다. 가족들 앞으로 짧은 유서를 남기셨습니다” 서울 경복궁에서 열린 국민장 영결식 때 이명박 대통령의 헌화 순서 때 백원우 의원이 “정치보복 사죄하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영결식이 끝날 때 “조문 오신 분한테 예의가 아니게 됐다”며 고개 숙여 사과를 했습니다. 그는 문재인입니다.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회관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정사진을 들고나와 임시분향소로 이동하는 문재인 비서실장과 이병완 비서실장(사진=노무현재단)
유서는 짧았습니다. 단 14줄의 문장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 오래된 생각이다” 수많은 국민들이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노사모 때부터 참여정부 마지막까지 지지했던 이들도, 이라크파병·대연정·한미 FTA 때문에 지지를 철회했던 이들도, 폭등하는 아파트 가격에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채 비난을 퍼붓었던 이들도, 모두가 한마음이었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봉하에는 노란 물결이 일렁입니다. 돌이켜보면 열정의 과욕과 준비부족도 한계였지만 참여정부가 그토록 박한 대접을 받았어야 했는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처럼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외롭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사는 세상’을 원했던 그는 노무현입니다. 친구 문재인은 그를 부활시켰습니다.

유서 전문을 출력한 최초 원본을 늘 지갑 속에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의 가치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재단을 만들고 추모사업에 매달렸습니다. 정치는 여전히 어색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늘 피해 다녔지만 친구가 세상을 떠난 후 정치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2012년 대선실패 이후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국정농단을 시작으로 탄핵을 거쳐 조기대선까지.위대한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소수파 정권의 탄생에 걱정이 쏟아졌습니다. 요약하면 ‘참여정부 시즌2가 아니라 노무현을 뛰어넘어야 한다’였습니다. 1년이 흘렀습니다. 모든 건 기우였습니다. ‘사람이 먼저다’고 외쳐왔던 그는 문재인입니다. 어쩌면 그는 노무현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2002년 12월 6일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열린 ‘새정치를 실천하는 부산시민후원회’에서 꽃다발 전달하는 어린이들을 안고 활짝웃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사진=노무현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