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사내벤처 프로그램, 2.5억 시각장애인의 희망 만들다

by이재운 기자
2017.08.20 11:00:00

C랩 프로그램 통해 개발한 ''릴루미노'' 앱 개발, 출시
수 백만원 이상 전문장비를 10만원대 기어VR로 대체
분사 시에는 최대 10억 투자 "삼성 R&D 생태계 확장"

서울 태평로 삼성전자 기자실에서 지난 18일 오전 진행한 ‘릴루미노’ 시연회에서 취재진들이 저시력자 체험 특수안경과 릴루미노 앱을 설치한 기어VR을 착용하고 그림 작품이나 글자를 보고 있다. 사진=이재운 기자
[이데일리 이재운 기자] “앞에 누가 보여요?” “단발머리에… 어, 엄마?”

희미한 명암만 구별하는 수준의 ‘저시력자’는 시각장애인의 80% 이상, 전 세계적으로 2억5000만명이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는 최소 400만원대, 많게는 수 천만원대의 장비를 이용해야만 겨우 글씨를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삼성전자(005930) 개발자들이 만든 ‘릴루미노(Relumino)’ 앱을 설치한 가상현실(VR) 헤드셋 ‘기어VR’로 보자 글자는 물론 그림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개발제품 시험에 참여한 김찬홍 한빛맹학교 교사는 “VR 장비가 그저 오락거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각장애인에게 개인마다 맞게 최적화(Customization)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놀랐다”고 말했다.

20일 삼성전자는 기어VR에서 저시력자가 사물이나 사람을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릴루미노 앱을 오큘러스 스토어에서 제공하기 시작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18일에는 서울 태평로 삼성전자 브리핑룸에서 언론을 대상으로 시연행사를 개최했다. 릴루미노는 ‘시력을 되돌려주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10만원대 기어VR로 최대 0.9 수준 교정시력 제공

실제 시력이 0.2에 불과한 기자가 써보면 흐릿하게 보이던 글자나 형상이 마치 단순화된 형태로 보인다. 시연장에 마련한 구스타브 클림트의 ‘유디트’를 보자 마치 웹툰 그림체처럼 다소 번지는 듯하면서도 단순화된 모습으로 보인다. 빛을 약간 번지게 표현해 명암 구분 정도만 가능한 저시력자가 전체적인 윤곽을 볼 수 있게 한 것. 실제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어떤 물체나 글자인지 파악 가능한 수준이다.



이 상태에서 저시력자의 시야 상태처럼 보이게 하는 특수 안경을 끼고 다시 체험해봤다. 특수안경만 낀 상태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던 시계 바늘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글자의 경우 원래 색상대로 보면 글자가 번져 잘 보이지 않지만, 색상을 반전시키자 검은 바탕에 흰색 글자가 나타나며 내용을 읽는데 무리가 없었다.

조정훈 CL(프로젝트 팀장)은 “원래 저시력자가 안경 등 교정장치를 낀 채 볼 수 있는 최대 교정시력이 0.1 수준인데, 이 앱을 사용하면 최대 0.9 수준까지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발진이 공개한 필드테스트 영상에서는 한 학생이 마침 학교에 찾아 온 엄마의 얼굴을 처음으로 또렷하게 보며 놀라는 모습이 담겼다. 개발진은 삼성전자로부터 추가 지원을 받아 야외에서도 착용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안경 형태의 제품 개발도 추진한다.

저시력자의 경우 왼쪽 아래처럼 글자가 희미하게 보여 내용 파악이 어렵다. 릴루미노 앱을 통해 필터를 적용한 기어VR을 이용해서 보면 오른쪽처럼 일부러 이미지를 약간 번지게 만들어 저시력자도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흰 배경에 검은 글씨 그대로는 읽기가 어려워 글자를 볼 때는 색 반전을 통해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보이도록 작동한다. 삼성전자 제공
◇변화에 대처하는 C랩, 삼성의 R&D 생태계 확대로

이 사업은 삼성전자가 6년째 운영 중인 C랩 과제 중 하나로 추진됐다. 2012년부터 시작된 이 제도는 삼성전자 내부 개발 인력이 기존 사업체계와는 다른 새롭고 색다른 연구 프로젝트를 시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이재일 삼성전자 창의개발센터 상무는 “잘 조직화된 것이 삼성전자의 장점이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앞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새로운 환경에 대응할 수 없어 C랩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며 “1년 간 과제 진행이 끝난 뒤에는 DMC연구소장이 위원장을 맡는 ‘출구전략심의위원회’를 통해 관련 사업부 이관이나 스핀오프(분사 창업)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또 사회공헌 과제도 8개를 진행 중인데, 릴루미노 앱도 이중 하나다. 앞서 C랩 과제로 2014년 지체 부자유자가 눈의 움직임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수 마우스를 개발해 무료 보급하기도 했다.

중장기 선행기술을 연구하는 DMC연구소가 주도하지만, 각 사업부나 해외 소재 연구조직에서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완성도와 시장 성공 가능성을 동시에 높이는 ‘린&애자일(Lean & Agile)’ 개념을 도입, 회사 내에서도 과제와 관련된 경험자나 전문가가 의견을 나누고 협업할 수도 있도록 하고 있다. 현재까지 180여개 과제가 진행됐고, 이중 25개 과제는 분사를 통해 벤처 창업으로 이어졌다. 이놈들연구소, 망고슬래브, 쿨잼컴퍼니, 스케치온 등 곳곳에서 성과를 내는 곳들이 나타나고 있다. 분사 시에는 삼성벤처투자를 통해 최대 10억원을 투자한다. 이 상무는 “C랩을 통해 삼성전자 중심의 R&D(연구개발) 생태계 확대는 물론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바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