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회장 10주기]③시대 공감,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

by이창균 기자
2011.03.16 08:03:51

`통일소`와 함께 訪北..실향 아픔에 대중 `공감대`
기업보국론 선구자..노사 관계 원칙 중시
학력보다는 능력 위주 인사

[이데일리 이창균 기자] `신문지상에 개인 소득 랭킹 1위다 어쩌다 하는 발표가 있을 때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중략) 나는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척도를 돈으로 하지 않기를 원한다.`  -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중에서, 1991년, 제삼기획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지난 1991년 출간된 자서전을 통해 "사람들이 나를 돈이라는 척도로 평가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다. 사실 고인의 이름이 세인들 입에 오르내리고야 마는 주된 이유는, 그가 기업인으로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기 때문일 테다.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세인은 그를 끝내 다르게 본다. 그에게는 왕회장이라는 별칭을 줬다. 그가 세상을 뜬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국민들은 해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 수위에 그 이름을 올린다. 이따금 부패한, 혹은 이권 다툼에 골몰한 기업인의 이야기가 신문·방송에 등장할 때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정 회장을 회고한다. 꽤 다수의 혹자는, 정 회장과 같은 기업인이 그립다며 희구하고야 만다. 정 회장은 자신이 `원했던 바`를 상당 부분 이룬 채 영면했다.

그는 생전에 어떤 마법을 부렸나.



프랑스 출신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충격적인 전위예술 작품"이라고 칭했던 정 회장의 지난 1998년 6월 16일 `소떼 방북`은, 그 자체로 역사의 한 장면이 됐다. `통일소` 500마리와 사료를 가득 태우고 실은 트럭과 함께 정 회장은 판문점을 돌파했다. 정 회장은 남북 분단 이후 정부 관리의 동행 없이 판문점을 통과한 최초 민간인이 됐다.

▲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지난 1998년 6월 소떼 500마리를 태운 트럭 등으로 판문점을 넘고 있다.(출처=현대그룹 홈페이지)

그의 방북은 소르망의 표현대로 단순히 `아름답고 충격적인 전위예술`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현대그룹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브랜드 강화·홍보 효과를 거뒀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당대 적지 않은 국민들의 이미지 속에만 있던 남북 평화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한 기업인이 현실화해 보여줬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와 외환 위기 촉발 직후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도 민간 차원에서의 남북 교류·협력 분위기가 움텄다.



정 회장은 같은 해 10월 민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방문, 숙원인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켰다. 이후 개성공단 사업, 통일농구대회 개최, 남북철도 연결 사업 등을 잇따라 추진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이는 2000년 6월 열린 남북 정상회담과 함께, 휴전 이후 냉랭했던 남북 관계에서 화해 무드를 조성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 정 회장(가운데)이 1998년 10월 아들인 정몽헌 회장(오른쪽)과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모습.(출처=현대그룹 홈페이지)

비록 최근 몇 년간 북한의 잇단 도발로 금강산 관광 사업 등 남북 교류의 상당 부분은 위축된 상태지만, 기업인으로서 정 회장이 국가 정세에 기여했던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혹자는 정치적인 견해 차이를 들어 반대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종국에는 정치인이 아닌 기업인으로서 보인 비전과 실천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또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정 회장은 90년대 초반 소련의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을 만나 남북 통일 이후 자원 개발 등의 문제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는 등 꾸준히 관련 비전을 세웠다. 그 이면에는 정 회장 자신이 18세에 아버지 소 판 돈 70원만 갖고 가출한 실향민 출신이라는 동기가 있다. 당대,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수많은 실향민들이 정 회장의 방북을 지켜보며 묵묵히 지지한 데는, 시대적 아픔에 대한 공감대가 자리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아들인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며느리인 현정은 현 현대그룹 회장 등은 정 회장의 유지를 차례로 계승, 대북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만일 혹자가 정 회장을 가리켜 "시대를 앞선 인물이었다"고 평한다면, `소떼 방북` 경우에서처럼 그가 보였던 비전이나 성과를 그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남긴 경영 철학 또한 포함된다.
 
특히 재계에서 주요 화두로 논의되는 반(反)기업 정서나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상생협력) 이슈, 노사 갈등 문제 등도 정 회장의 경영 철학으로 짚어볼 만하다.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기업인이지만 그 이익을 거두어가는 곳은 정부라는 것을 국민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세액을 뺀 나머지 30퍼센트를 다시 고용 증대와 재투자에 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업이란 국가 살림에 쓰이는 세금의 창출에 큰 몫으로 기여하면서, 보다 발전된 국가의 미래와 보다 풍요로운 국민 생활을 보람으로 일하는 덩어리이지 어느 개인의 부를 증식시키기 위해, 뽐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 자서전 중에서

정 회장은 대기업이 커질수록 나라 경제가 불균형해지고 사회적 위화감이 조성된다고 보는 일부 시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기업이 무한히 성장해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함으로써 나라 밖의 부를 끌어모아야 한다"며 "기업은 국내에 많은 세금을 내고 고용을 창출하면서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기업의 크기를 갖고 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라, 대기업이 국내에만 주저앉아 시장을 독점하고 국제 경쟁 가격보다 비싼 제품을 국민에게 파는 것을 비판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오늘날 대기업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탁상공론만 반복하고 있는 일부 정·재계 관계자가 있다면, 혹은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내수에 안주한 채 자사 배불리기에만 급급한 일부 기업이 있다면, 새겨 들어봄직한 이야기다.
▲ 정 회장이 1987년 현대중공업 영빈관 잔디밭에서 현장 근로자들과 배구를 즐기고 있다.(출처=현대그룹 홈페이지)

그는 노사 관계에 있어 원칙을 중요시했다. 동시에 종종 기계공들과도 허심탄회하게 소주를 즐기는 소탈한 성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원칙을 따지되 포용도 할 줄 아는 가치관이었고 노동자의 근로 의욕 성취를 중시했다.
 
이는 무노조 경영을 하는 삼성그룹과 달리 노조 존재와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현대가의 특유한 기업 문화로 이어졌다. 아들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오늘날 노사 문제를 중시하고 주요 임원 인선 과정에서 이에 대한 이해도와 공헌도 등을 적극 반영하는 것도 선대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소학교 출신의 정 회장은 인재를 채용하는 데서도 학력에 제한이나 차별을 최대한 두지 않았다. 오늘날 기업들 사이에 반복되는 관행으로 지적되는 학력 제한·차별 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부분이다.

20세기 왕회장이 우리나라 경제의 태동·성장 과정에서 혹 시대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면, 남은 몫은 21세기 '포스트 정주영' 시대를 사는 우리 경제인들에게 있을 것이다. 진정성을 담은 노력과 불굴의 의지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일구는 것, 일세를 풍미했던 왕회장의 경영 인생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