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병재 기자
2011.11.30 08:27:29
김병재의 문화칼럼
쌔~앵’ 세밑 바람이 찹니다. 아버지의 발길이 분주합니다. 오늘따라 무척 허둥댑니다. 길모퉁이를 돌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 했습니다. 빌딩 사이로 부는 골바람에 때문입니다. 바람은 아버지를 날려버릴 기셉니다. 아버진 바람에 맞서 전진을 시도해 봅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버티어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점점 일그러지는 아버지의 얼굴. 이때 종잇장 하나가 날아와 아버지 얼굴을 때립니다. 물먹은 한지처럼 딱 붙어 떨어질 줄 모릅니다. 턱 숨이 막힙니다. 아버진 있는 힘을 다해 낙지발을 잡아떼 듯 종잇장을 뜯어냅니다. 이윽고 발 아래로 떨어지는 종잇장. 보면 올해 달력입니다.
달랑 한 장 남았습니다. 무상합니다. 출발은 좋았습니다. 거침없었습니다. 그러던 게 언제부터인지 꺾였습니다. 바람 때문입니다. 금년 유독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베이비부머 바람, 안철수 바람, 박원순 바람, 폴리테이너(정치연예인) 바람, MB 내곡동 사저의혹 바람, 88만원 세대 바람. 이뿐만이 아닙니다. 국회의원 성희롱발언, 나꼼수, FTA, 최루탄 국회, SNS, 쥐어 짜인 중산층(squeezed middle) 등등. 이 바람들이 휘모리 혹은 자진모리 장단으로 아버지의 뼛속까지 춥게 했습니다.
미당은 시 ‘자화상’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2011년을 키운 8할도 바람이었습니다. 그 바람 한 가운데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작가 이병동의 저서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에선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불혹의 아들이 시련에 직면하면서 우연히 고향집 벽장 안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가슴 아파합니다. 자식에 엄격하고 결코 지치지 않는 아홉 식구 가장인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너무나 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으로 가족과 미래 때문에 노심초사했다는 속내를 본 것입니다.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가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모습은 더 비극적입니다. 아내 린다는 아버지 윌리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아들에게 “아버진 위대한 분이 아니야. 그렇다고 아버지가 늙은 개처럼 무덤 속에 묻혀야 한단 말이냐? 아버지는 지칠 대로 지쳤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한번 지치면 그만이야”라고 야단칩니다. 아버지 윌리는 외판원으로 살아온 가장입니다. 평생 물건을 팔러 돌아다녔습니다. 윌리는 자식들에게 보험금을 남겨놓을 생각으로 자동차를 몰고 나가 기꺼이 죽음을 선택합니다.
올해를 살아온 대개의 아버지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꿈은 사라지고, 하루도 편히 쉬어보지도 못할 집 장만을 위해 평생 아파트 할부금을 붓습니다. 아들딸에게 큰소리치고 싶어도 가진 지갑은 너무나 얇습니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싶어도 자식 학원비가 우선입니다. 하지만 한때는 산처럼 큰 아버지였습니다. 바다처럼 깊고 넓은 아버지였습니다. 도시빌딩의 골바람이 아니라 엄동설한 동장군이 일으키는 칼바람에도 끄떡없던 아버지였습니다.
12월 한 달 남은 오늘, 살아온 인생 중 가장 젊은 날인 오늘, 아버지는 내일을 위해 꿈꿉니다. 바람은 해를 넘어 불 겁니다. 질풍노도가 일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뚜벅뚜벅 걸어갈 겁니다. 인간사 쉬운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사가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는 걸 이미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당신이 흘린 땀과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브라보 유어 라이프(Bravo Your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