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뽑아라"…갑질에 해고 위협 간신히 버티는 경비원들

by조민정 기자
2021.08.31 08:13:36

故최희석 경비원 사망케한 주민 실형 확정됐지만
또 다른 방식의 경비원 갑질 현장에 파다해
입주민 요구 안 듣자 다음날 해고 민원 넣어
"회의실에 명패만 '휴게실' 붙여 침대도 없어"
2만원 넘으면 전기세 개인이…"인사평가 두려워"

[이데일리 조민정 기자] “갑질이 다른 게 아니더라고요. 당했을 땐 잘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면 ‘아 이게 갑질이구나’하고 느끼는 거죠.”

경비원 고(故) 최희석씨를 폭행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아파트 주민이 최근 대법원에서 실형을 확정받으며 사회적 공분을 산 ‘경비원 갑질’ 사건이 일단락됐다. 하지만 경비원들은 주민 갑질 외에도 열악한 처우라는 또다른 ‘갑질’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들의 무리한 요구도 응대하지 않으면 해고 위협에 시달리고 수개월밖에 안 되는 단기계약 특성상 인사평가를 늘 신경써야 한다. 매번 해고 문턱에서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안전장치가 형성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노원구 A아파트 경비실 에어컨 아래 부착된 ‘에어컨 사용 지침서’ 모습이다. 전기요금이 월 2만원이 넘을 경우 사용자가 개인부담해야 한다고 쓰여져 있다.(사진=조민정 기자)
29일 대법원 제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최희석씨를 폭행하고 협박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보복상해)로 기소된 심모(48)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주민인 심씨는 지난해 4월 21일 이 아파트 경비원인 최씨와 주차 문제로 다툰 뒤 최씨를 폭행하고 감금하고 협박한 혐의를 받는다. 최씨는 고통을 호소하고 억울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그해 5월 10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최씨 사망 후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고 경비원 처우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경비원의 처우 개선을 위한 관련법이 마련되고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법과 동떨어진 모습이다. 오는 10월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에는 △휴게시간·휴게공간 설치 규정 강화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 등과 더불어 경비원의 업무 범위를 한정했다. 다만 여전히 경비원들은 침대도 없는 휴게공간에서 새벽 근무시간을 보내야 하고 업무 외 요구도 모두 응대해야 하는 현실이다.

서울 노원구 A아파트에서 근무 중인 윤모(69)씨는 얼마 전, 전 동대표로부터 화단의 잡초를 뽑으라는 요청을 받았다. 제초작업반이 따로 마련돼 있는데다 경비원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한 윤씨는 “나중에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온 건 해고 위협이었다. 자신의 요청을 듣지 않자 입주민이 직접 관리사무소에 해고하라는 민원을 넣은 것이었다.

경비원 업무가 처음이었던 윤씨는 “해고당하면 당하는 거긴 한데, 다음 달이면 근무한 지 1년이 돼서 퇴직금이라도 받아야 한다”며 “관리소장이 한 달만 어떻게 잘 봐달라고 입주민한테 가서 잘 얘기해보라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2017년부터 서울 관악구 B아파트에서 근무한 정모(74)씨는 경비실 휴게 공간을 마련해준다는 소식에 내심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명목상 휴게실일 뿐 관리사무소에서 사용하던 회의실에 버젓이 명패만 붙여놓은 공간이었다. 정씨는 “안에 침대도 없고, 회의실로 쓰는 공간 그대로니까 소파 하나라서 잠 자기도 불편하다”며 “경비원들은 23시부터 아침 6시까지 휴게 시간인데 어디서 쉬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부분은 우리가 직접 말하기도 어렵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2020년 5월 11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전날 주민 갑질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한 이 아파트 경비원 최희석씨를 추모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서울 노원구 A아파트는 지난 4월 경비실마다 에어컨을 설치했다. 그러나 에어컨과 더불어 계량기와 ‘경비실 에어컨 사용 지침서’가 경비실마다 배치됐다. 여기에는 ‘전기요금 월 2만원 초과 시에는 초과분에 대해 사용자가 개인 부담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24시간 내내 근무하는 경비원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해당 아파트에서 2년 가량 근무한 김모(53)씨는 전기요금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니 마음껏 쓸 수 없는 처지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씨는 “어떤 사람은 콘센트를 다른 구멍에 꽂으면 계량기에 측정이 안된다고 하더라”며 “이런 식으로 전기세 부담 안 가게 피해서 몰래 쓰는 사람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 초소마다 2명씩 교대근무를 하는 경비원끼리 누가 얼마나 사용할지 소위 ‘협상’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다음 근무자가 더 많이 썼다’는 말이 나오면 서로 불편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어서다. 2만원이 초과돼 사비로 충당한다고 해도 업무고과에 반영될까 노심초사하기도 한다.

A아파트 경비원인 이모씨는 “24시간 맞교대인데 서로 얼마 썼냐고 불화가 생길 수도 있어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며 “사비로 충당하고 싶어도 혹시나 계약 연장에 불이익이 있어서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고 고백했다. 윤씨 또한 “지금도 이렇게 계속 껐다 켰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답답함을 내비친 입주민 이모씨는 “세대별로 전기세를 나누면 세대 당 천원 미만의 비용이 청구될 뿐인데, 이걸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어렵지 않은데 실현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고 우려했다.

김선기 민주노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교육선전실장은 “잡초 제거 등 업무들을 경비원이 해야 할 일이라고 보는 건 어렵지만 경비원들은 이런 일들로 해고 위협에 항상 노출돼 있다”며 “올해 연말에도 내년도 예산 측정 과정에서 입주민대표 측은 관리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경비원들을 해고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에 대한 안전망이 구축돼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