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태·홍광호도 '대타'이던 시절 있었다

by김미경 기자
2016.02.25 06:18:00

공연계 '커버'의 세계
박은태, 조성모 대신 투입돼 초대박
주연자리 메우다 '진짜 주인공' 돼
'레베카' 장은아·'바람사' 함연지 등
실력 인정 받으며 스타탄생 예고
"오랜 무명생활 성실히 보낸 결과"

공연계 대스타도 알고보면 대타시절이 있었다. 홍광호(왼쪽)는 신인시절 마이클리 대타로 활약한 뒤 주역을 꿰찼다. 뮤지컬 ‘레베카’에 출연 중인 장은아(오른쪽)는 중도하차한 가수 김윤아의 대타로 뒤늦게 투입됐다가 8년 만에 무명의 서러움을 털게 됐다(사진=씨제스컬쳐·EMK).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배우 박근형, 박상원, 정진영, 홍광호, 박은태, 주원. 지금은 주역을 꿰찬 명불허전 톱스타인 이들도 한때 누군가의 ‘대타’였다. 배우 박근형은 조연출로 작품에 참여해오다 배우 최종원의 대타로 대학로 연극무대에 처음 올랐고, 박상원은 스무 살 때 시간에 늦은 유인촌을 대신해 연극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빌라도 역을 맡았다가 이후에도 주역자리를 꿰찼다.

박은태는 2010년 발목을 다친 조성모를 대신해 뮤지컬 ‘모차르트!’ 무대에 오른 뒤 승승장구 중이다. (사진=씨제스컬쳐).
한국배우 최초로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에 진출한 홍광호도 비슷한 경우다. 2006년 한국 초연한 ‘미스 사이공’에서 주연 크리스와 조연 투이 역의 대타를 맡았다. 당시 크리스 역의 마이클 리에 목소리에 이상이 생겨 대체투입된 후 실력을 인정받았다. 박은태는 TV 예능프로그램 ‘출발드림팀’ 촬영 중 부상을 입은 조성모 대신해 급하게 투입됐다 스타덤에 올랐다.

야구 얘기가 아니다. 공연계에도 대타를 의미하는 ‘커버’(cover)란 말이 있다. 주역이 부득이하게 무대에 설 수 없는 위기상황에 그 자리를 대신하는 ‘대체자’를 뜻한다. 대사와 노래·춤 등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지만 사실 언제 무대에 설지 모르는 역할이다. 언더(understudy)·얼터(alternate)·스윙(swing)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항시’ 대기 중인 ‘내일의 주인공’을 들여다봤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객석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폭발하는 광기와 쭉쭉 뻗어 올리는 고음이 관객을 집어삼킬 듯했다. 한명의 스타 탄생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뮤지컬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 역을 맡은 장은아(33)는 서울공연 개막 직전 ‘성대 근육 조절 이상’이란 진단을 받은 가수 김윤아를 대신해 긴급 투입됐다.

‘팬텀’서는 크리스틴 다에 역 커버를, 최근 폐막한 ‘드라큘라’에선 미나와 루시 역 커버를 맡은 배우 김지유(사진=EMK).
김윤아가 하차한 뒤 오디션 제의를 받고 실제 무대에 오르기까지 불과 3주 남짓. 장은아는 노래와 대사를 완벽히 익히고 혼신을 다했다. 장은아의 첫 무대를 본 관객들은 “대타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었다. 8년이란 무명생활을 성실하게 보낸 결과”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뮤지컬 ‘팬텀’에서 주인공 크리스틴 다에 역인 임선혜·임혜영·김순영의 커버로 활약했던 김지유(35)는 최근 ‘드라큘라’에서도 커버를 맡았다. 2009년 ‘모차르트!’로 데뷔한 김지유는 팬텀을 통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임혜영이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대신 무대에 서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드라큘라’에서는 미나와 루시 역의 커버를 맡았으나 단 한 번도 무대에 서지 못했다. ‘드라큘라’ 한 관계자는 “팬텀에서 김지유의 활약을 듣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단 2주라는 짧은 공연기간 때문에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커튼콜 때 올라간 게 전부”라고 말했다.

커버에도 등급이 있다. 그중 ‘얼터’는 주 1~2회 혹은 총 몇회 등의 출연을 보장받고 무대에 오르는 배우를 말한다. 1개 배역을 1명의 배우가 소화하는 ‘원캐스팅’이나 ‘8~10개월간 장기공연’이 일반적인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는 낮 공연 등에서 얼터 배우가 무대에 선다. 단 출연회수는 적다. 종합식품회사 오뚜기의 창업주 함태호 명예회장의 손녀이자 함영준 회장의 장녀로 알려진 함연지도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얼터였다가 이후 ‘무한동력’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 꾸준히 서고 있다.

오뚜기 창업주의 손녀이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얼터로 활약했던 함연지(왼쪽)와 ‘데스노트’의 라이토 커버였던 배우 이창용.
‘언더’는 보통 앙상블 등 다른 배역을 연기하기도 하지만 얼터와 달리 주인공 대타로는 언제 무대에 오를지 기약 없는 ‘차차선’이다. 주역이 고사하기 전 무대에 오를 일이 없다. 그만큼 존재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스윙’은 ‘만능열쇠’란 표현이 적합하다. 코러스·군무를 담당하는 앙상블배우가 공석일 경우 대체한다. 개별 앙상블마다 대사와 노래·춤은 물론 개인기와 동선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스윙은 이들의 특징을 모두 외우고 미리 연습해야 한다.

커버의 오디션이 따로 있지는 않다. 앙상블이나 주·조연 오디션을 볼 때 주연 이미지와 맞는 인물이 있으면 커버감을 점지하는 편이다. 개런티는 제작사마다 다르지만 단순한 대타가 아닌 만큼 앙상블보다 많은 보수로 일한다.

권은아 EMK 협력연출은 “커버배우 이미지가 굳을까 봐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성실하게 역할을 맡아 두각을 나타내는 배우들이 있다. 공연 중인 ‘레베카’의 윤선용도 그런 케이스”라며 “2013년 레베카에서 프랭크 역의 커버를 맡았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프랭크 역을 꿰찼다”고 말했다. 이어 “제작사도 열심히 하는 배우들에게 좀더 기회를 주려는 편이다. 때문에 연습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귀띔했다.

클래식계에도 커버가 있다. 최수열(37) 서울시향 부지휘자는 지난달 16~17일 서울시향 정기연주회에서 사퇴한 정명훈을 대신해 지휘봉을 잡아 호평을 이끌어냈다. 소프라노 임선혜(40)는 카를스루에국립음대에 유학 중이던 23세 때 지휘자 필립 헤레베게가 이끄는 ‘모차르트 C단조 미사’의 대타 제안을 덥석 받아 유럽 고음악계의 대표 디바로 자리매김했다. 2005년 독일 부퍼탈시립극장에서 오페라 ‘자이데’를 통해 연출가로 데뷔한 김요나도 여기에 속한다. 원래 예정된 연출가의 대타였지만 참신한 연출로 주목받은 뒤 유럽 주요 오페라 무대로부터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

클래식계 대타로 큰 무대에 데뷔했다가 스타로 떠오른 소프라노 임선혜와 최수열 서울시향 부지휘자.
해외에선 커버가 일반적이지만 국내의 인식은 아직 적은 편이다. 원캐스트로 진행한 뮤지컬 ‘데스노트’는 커버 캐스트를 공지했다가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홍광호가 연기하는 라이토 커버에 배우 이창용, 김준수의 L은 김재민, 미샤 이수빈, 렘 유신, 류크 오석원이 커버를 맡았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해외에선 고음역대의 곡이 많거나 원캐스트, 장기공연인 경우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커버를 두는 게 일반적인데 국내에선 대타가 무대에 서면 거센 항의를 받는다”며 “스타지명도가 높을 때는 울며 겨자먹기로 아예 공연을 취소할 정도다. 뮤지컬은 스타 콘서트가 아닌 만큼 주객이 전도된 관행은 아쉽다”고 말했다.

2006년 한국 초연한 ‘미스 사이공’에서 주연 크리스와 조연 투이 역의 대타를 맡았던 홍광호는 2014년 한국인 최초로 영국 무대에 올라 ‘미스사이공’ 투이 역으로 활약했다. 당시 공연모습(사진=C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