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의 문화재 읽기]신라 공주도 바둑 즐겼나?...남성 전유물 통념 깼다

by김은비 기자
2020.12.14 06:00:00

동남쪽 위치한 신라, 中과 교류기회 적어
고구려백제보다 늦은 통일신라때 첫 등장
최근 신라 여성 무덤서 바둑돌 발굴

경주 쪽샘 44호분 바둑돌 출토 모습(사진=문화재청)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최근 1500년 전 경주 신라왕족 여성의 무덤에서 바둑돌이 나오면서 바둑의 역사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현대의 바둑은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오락이다. ‘꼼수’, ‘초강수’, ‘무리수’ 등 다양한 바둑 용어를 일상에서 사용할 정도로 우리 삶에도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바둑을 남성 귀족의 전유물로 인식했다. 지금껏 남성 무덤에서만 바둑 유물을 출토했기 때문이다. 이번 발굴은 지금까지의 통념을 깬 성과다.

바둑의 정확한 기원은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고대 중국 전설상의 제왕인 3황5제 때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반도에는 5~7세기 사이 삼국시대에 소개된 것으로 전해진다. 바둑은 삼국시대를 지나 한국전통 바둑방식인 순장바둑이라는 형태로 고려·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실제 이순신 장군도 평소 바둑을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 순장바둑은 1950년대 현대바둑이 유행하기 전까지 성행했다.

한반도에서 바둑을 뒀다는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대의 기록에 따르면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도림 스님을 첩자로 백제에 보냈다. 개로왕과 바둑을 두며 신임을 얻게 된 도림은 대규모 토목공사가 시급하다고 개로왕에게 주장했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어지자 백성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이 상태에서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지 7일 만에 한성을 빼앗겼다.

이같은 기록은 바둑 문화가 5세기 백제 지배층의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재 일본 정창원에 전해지는 바둑 관련 유물들 가운데 백제 의자왕이 보냈다고 하는 바둑판 및 바둑알 일습도 당시 바둑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신라의 바둑에 대한 기록은 백제, 고구려보다 늦은 통일신라기에 가서야 비로소 나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제34대 효성왕(737~742)이 즉위하기 전 왕자로 있을 때 신하 신충과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효성왕 즉위 후에 대한 기록도 담겼다. 효성왕 2년 당나라 현종이 성덕왕 승하 소식에 조문 사절을 보내면서 “신라 사람들은 바둑을 잘 둔다고 하니 특별히 바둑 잘 두기로 유명한 병조참군 양계응을 부사로 대동하라”고 기록돼 있다.

이희준 경북대 명예교수는 신라에서 바둑 관련 기록, 유물이 늦은 이유에 대해서 “단순히 기록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신라가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해 중국과 직접 교류할 기회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적었기에 바둑 문화도 그만큼 늦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바둑이 유행했는지는 정확히 기록상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로 신라시대 최상위급 무덤에서 바둑돌 유물을 출토했기에 당시 귀족들이 즐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마랑’이라는 글씨가 적힌 바둑통과 함께 바둑돌로 추정되는 돌 243개가 확인됐다. 또 천마총(350여점), 금관총(200여점), 서봉총(2점) 등에서도 바둑돌 유물을 발견한 바 있다. 전경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기록상 바둑은 신라시대의 놀이 문화 중 하나였지만, 여성이 즐긴 놀이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남대총 남분 ‘마랑’명 칠기 복원품(사진=국립중앙박물관 ‘황남대총’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