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최정희 기자
2023.03.28 07:32:01
[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국채에 투자해 망해본 적이 있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별 문제가 없다는 그런 자산 말이다. 그런데 국채에 잔뜩 투자했다가 망한 은행이 생겼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얘기다.
SVB가 망한 것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정책금리를 아주 빠른 속도로 올려 국채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SVB는 은행업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유동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문을 닫게 됐다. 총 자산의 절반 가량을 국채 등에 투자한 SVB는 주고객층인 스타트업들의 대규모 예금 인출에 대응한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안 좋다는 ‘소문’은 온라인·모바일 뱅킹의 빠른 예금 인출로 나타났다.
SVB 다음으로 문을 닫은 시그니처 은행에는 2008년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 금융기관에 규제를 강화하는 ‘도드-프랭크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법까지 만들었던 바니 프랭크 전 하원의원이 이사로 있었다. 금융규제를 강화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 정작 시그니처 은행에선 로비를 통해 규제에서 빠지려고 노력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도드-프랭크법’은 2018년 완화됐고 SVB, 시그니처 등 중소·지역은행들은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등 유동성 규제를 안 받게 됐다.
‘유동성’을 무시한 은행처럼 교과서적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례는 또 있다. 스위스 규제당국(FINMA)이 크레디트스위스(CS)를 구제하는 과정에서 주식·채권 투자자를 역차별했다.
CS의 코코본드, AT1에는 ‘특별한 공공부문 자본 지원이 요구되는 경우에 상각된다’는 조건이 달려 있는데 CS가 스위스 중앙은행(SNB)의 구제금융을 받았기 때문에 ‘상각’ 조건을 충족, 코코본드 투자금은 100%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코코본드는 유사시 투자 원금이 주식으로 강제 전환되거나 상각된다는 조건이 붙은 회사채다.
여기까지만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UBS가 CS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CS의 모든 주주는 22.48주당 UBS 1주를 받게 됐다. 코코본드 투자자가 한순간에 자신의 돈을 모두 잃게 된 것과 상반된다.
주주는 회사 경영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회사 주인인 반면 코코본드 투자자는 일정 조건 하에 주식으로 전환되거나 상각될 수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성격은 채권자다. 인수 비용을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경영 부실을 초래한 주주보다 돈을 빌려준 채권자의 손실이 더 커지면서 자본주의 원칙이 훼손됐다.
유럽은행 감독청은 뒤늦게 “보통주는 손실을 흡수하는 첫 번째 상품이고 보통주로 손실을 충분히 흡수한 이후에야 AT1이 손실을 흡수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투자자들의 신뢰는 무너졌다. 누가 이런 은행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겠는가. 2017년에도 스페인 은행 방코 포풀라(Banco Popular)의 코코본드가 상각됐지만 당시엔 주식 투자금(자본)도 상각됐다.
단기 예금을 받아 장기로 투자하면서 유동성 관리에는 안중에도 없었던 은행부터 경영 부실에 책임이 있는 주주를 보호하면서 코코본드를 100% 상각키로 한 스위스 당국까지, 최근 벌어진 안전자산의 배신은 기본과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