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늦은 편지…이용만 전 장관 "산업화에 기여한 삶, 부모님께 전합니다"

by한광범 기자
2020.10.16 06:00:00

6.25때 헤어진 부모님께 드리는 ''부모님 전상서'' 발간
한국 금융정책 역사 산증인…이재국장 최장 재임 기록
"70년 늦었지만 부모님께 못다한 이야기 전하고 싶어"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이 14일 서울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방인권 기자]
[세종=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아버지, 어머니! 승만이(이용만 전 재정경제부 장관 아명)가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용만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14일 서울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가진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출간한 ‘부모님 전상서(Ode to My Parents)’를 통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이렇게 밝혔다. 지금은 북한땅인 강원도 김화가 고향인 이 전 장관은 한국전쟁 중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이다.

1933년생인 이 전 장관은 올해 87세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이던 1950년 10월 가족과 생이별했다. 이 전 장관에겐 아직도 가족은 사무치게 그리운 이름이다. 이 전 장관은 “가족과 헤어진 후 통일을 기다렸다. 10년·20년 기다리다가 허탈한 심정으로 이제라도 기록으로나마 부모님께 올리는 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4개월 후인 1950년 10월 홀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국군 학도대원으로 치안활동을 나간 사이 인민군이 고향땅을 점령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승만이만 놓고 갈 수 없다’며 방공호에서 이 전 장관을 기다리던 어머니와 형·동생은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당시 터널 공사에 차출됐던 아버지만 화를 피했다고 한다. 이 전 장관은 남으로 피난 온 이웃을 통해 당시 상황을 전해 들었다서 했다. 그는 “가족 이야기를 전해 듣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분에게 고맙단 인사도 못 드리고 자리를 떴다”고 글썽였다.

이 전 장관은 이번 저서를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했다. 한국전쟁 중 총상을 입고 죽어가던 자신을 구조해준 미군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다. 남한으로 피난 온 그는 이듬해인 1951년 국군에 입대했다.

입대 후 얼마 뒤인 같은 해 5월 강원도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총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총상을 입고 쓰러져 능선을 따라 굴러떨어지던 중 절벽 인근에서 나무에 걸려 목숨을 건졌다.

“그때는 죽을 줄 알았다. 당시 하늘을 보니 아버지가 근심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걱정하는 모습도 보였다.” 총상을 입은 그를 지원나온 미군이 구했다.



이 전 장관은 공직을 맡은 뒤 백방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미군들을 찾았다. 한 미군 예비역으로부터 “중공군 매복으로 목숨을 잃은 미군들 같다”는 편지를 받았다. 이후 이 전 장관은 그 대신 매년 추수감사절이면 미8군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 우리나라를, 죽어가던 자신을 구해준 미국에 대한 보답이라고 했다.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이 1991년 10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IMF 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이용만 제공.
이 전 장관은 우리나라 금융 정책의 산증인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던 1971년 9월부터 1975년 2월까지 3년 6개월동안 재무부 이재국장(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을 역임하며 금융정책을 설계했다.

당시 통상 이재국장 재임기간이 1년2개월을 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었다고 한다. 이 전 장관은 “정부 수립 후 가장 오래 이재국장을 했다.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남덕우 전 재무부 장관(재임기간 1969년 10월~1974년 9월)과 함께 오랜 기간 손발을 맞췄다. 이 전 장관은 “남 전 장관과 함께 이재국장으로 일하며 금융산업의 현대화를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다”고 돌이켰다.

스스로 꼽는 대표적 성과가 사채업체들을 상호신용금고(현 저축은행)라는 이름으로 양성화한 것이다. 그는 “1960~70년대 경제성장을 위해 금융자금 대부분이 산업자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서민들은 대부분 사채를 쓸 수밖에 없었다. 상호신용금고법을 만들어 사채시장을 양성화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사채업자들에게 문호를 열어주는 것에 대해 금융업계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 전 장관은 이를 밀어붙였다. 이를 통해 사채업체들은 상호신용금고라는 이름아래 양지로 끌어냈다.

이 전 장관은 김영삼정권 이후 상호신용금고 개혁 작업이 후퇴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500개에 달하던 사채업체들을 법의 울타리안에 끌어안은 뒤 통폐합을 통해 100개 정도를 남겨 이를 서민금융기관으로 키우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시장 자율화를 주창한 김영삼정부는 오히려 상호신용금고를 늘려 나갔다. 이 전 장관은 “상호신용금고가 늘어나며 무분별하게 외국의 단기차입금을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1997년 외환위기를 불러오는데 한 요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 전 장관은 무궁화신탁 명예회장으로서 여전히 대외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대해선 “코멘트하지 않겠다”고 짧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