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장관·의원 잇따라 영장 기각…"영장 남발 탓" Vs "사람따라 오락가락"

by이승현 기자
2018.07.07 09:00:00

삼성 노조와해 의혹 사건 13건 청구해 11건 기각돼
한진그룹 이명희·이채필 前장관 등 영장 줄줄이 기각
法, '혐의소명 부족·다툼 여지' 등 수사미진 부족 지적
인권보호 위한 검찰 영장독점청구권 주장에 흠집사유
法 "구속심사 신중 불가피"…檢, '심사 형평성'에 의문

수백억 원대 상속세 탈루 등 비리 의혹을 받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5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양천구 서울남부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이승현 한광범 기자] “피의 사실들에 관해 다툼의 여지가 있다”

서울남부지법 김병철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수백억원대 상속세 탈루 등 의혹을 받는 조양호(69) 한진그룹 회장엑 청구된 구속영장을 이 같은 사유로 기각했다. 김 부장판사는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어 현 단계에서 구속해야 할 사유와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조 회장의 둘째 딸 조현민(35) 전 대한항공 전무의 이른바 ‘물벼락 갑질’ 사건으로 국민적 공분이 일자 경찰과 검찰은 한진그룹 일가에 대한 전방위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조 회장 아내 이명희(69)씨에 이어 조 회장에 대한 구속 시도도 결국 불발되자 성난 여론에 편승한 영장청구가 아니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 들어 검찰이 사회적 관심이 많은 사건 수사에서 청구한 영장이 잇따라 기각되고 있다. 특히 법원이 주거 불분명과 도주 우려, 증거인멸 우려 등 구속사유 불충족이 아나라 소명 부족 등 혐의 자체에 의문이 든다며 기각하는 사례가 많다.

이 때문에 검찰이 특정 사건 및 인물 대한 거센 비난여론과 뿌리깊은 구속수사 관행 등 때문에 영장을 남발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힘을 얻는다. 우리 형사법은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삼는다.

반면 검찰은 유사한 사건임에도 영장심사 판사와 피의자가 누구냐에 따라 구속영장 발부 여부가 달라진다며 법원의 영장 발부 기준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라고 비난한다. 최근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 법원 수사를 두고 검찰 견제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온다.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부장 김성훈)는 올 들어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의혹 사건 수사에서 총 13건의 구속영장을 청구해 11건을 기각 당했다. 검찰은 삼성전자서비스의 대표를 포함해 주요 임원, 노무사, 전 협력업체 대표, 자문역할, 사망한 노조원의 부친 등 주요 연루자들 대부분에 영장을 청구했지만 줄줄이 기각됐다.

검찰은 특히 박상범(61) 전 삼성전자서비스 대표에게 청구한 영장이 기각되자 불과 1주일 만에 또 청구했지만 역시 기각당했다. 당시 법원은 “피의자가 일부 범죄혐의에 대해 형사책임을 인정하지만 범죄사실의 많은 부분에 대해선 다툴 여지가 있다”고 짚었다. 2번째 영장 청구도 혐의 소명이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한진그룹 일가의 각종 ‘갑질’ 사건에선 수사기관이 여론을 지나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검찰은 조 전 전무의 사건에선 폭행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점 등을 감안해 경찰이 신청한 영장을 반려하고 불구속 수사를 지휘했다. 반면 어머니 이씨의 경우 운전기사 등 주변인물에 대한 장기간의 각종 폭언과 폭행 혐의로 경찰에서 검찰을 거쳐 영장이 청구됐지만 법원은 기각했다. 이씨는 이어 필리핀 가사도우미 불법고용을 지시한 혐의로 다시 구속심사를 받았지만 피해갔다. 법원은 “범죄 혐의의 내용과 수사진행 경과에 비춰 구속수사할 사유나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법원은 조 회장에 대한 혐의도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임 정권 시절 사건의 수사에서도 영장기각이 이어지고 있다. 검찰은 이명박 정부 시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노총 와해를 위해 이른바 ‘제 3노총’(국민노총) 설립에 관여한 혐의로 이채필(62) 전 고용노동부 장관의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법원은 “현 단계에서 범죄의 소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검찰의 수사 부족을 지적한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최근 노동조합과 관련된 공작사건에서 계속적인 영장기각에 대해 뭔가 다른 기준과 의도가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된다”고 반발했다. 법원의 영장기각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검찰이 청구한 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는 비율은 2012년 20.5%, 2014년 20.1%, 2016년 17.9%, 2017년 19% 등이다. 5건당 1건 꼴로 기각되는 셈이다.

그러나 사회적 관심이 많은 사건에선 영장 기각률이 평균보다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13건 중 11건이 기각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의혹 사건은 현재 서울중앙지검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건이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삼성전자와 삼성그룹 등 윗선 수사를 위해 핵심 혐의자들의 신병확보를 너무 의식하고 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 주요 간부들이 구속수사 성향이 강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며 “이른바 여론의 지지를 받는 사건 수사에선 영장청구로 피의자를 압박하려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했다.

검찰이 영장청구를 남발해 영장기각이 잇따른다는 지적은 수사권 조정 절차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검찰에 아픈 대목이다. 검찰이 영장청구권을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한 논리는 법률전문가로서 인권보호를 위해 경찰 등의 섣부른 영장신청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며 이유였다. 일례로 검찰은 황창규(65) KT 회장에 대한 경찰의 영장신청을 반려하며 “현 단계에서 구속할 만큼 수사가 되지 않았다는 취지”라고 했다.

법원행정처 통계를 보면 2013∼2015년 경찰이 검찰의 심사를 거쳐 법원에 청구한 구속영장 8만 3585건 가운데 17.2%(1만 4365건)가 기각됐다. 그러나 이 기간 검찰이 직접 청구한 구속영장(2만 2720건)의 기각률은 24.9%(5659)로 나타났다. 경찰 송치사건에 비해 검찰 직접수사 사건에서 구속영장 기각률이 높았다.

과거 재경지법에서 영장사건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구속은)신병과 관련된 사안으로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다”며 “범죄가 명백하지 않거나 증거인멸 우려가 없는 상황에서 검찰이 수사기법으로 영장청구를 남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른바 고위 경제인이나 관료 등 권력자나 조직적 범죄에서 지시자 등 윗선에게 주로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입장이다. 또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건에서 피의자별로 법원의 구속여부 결과가 다른 것도 검찰의 불만이다.

법원은 이명박 정부 시절 양대노총 와해를 위해 이른바 ‘제 3노총’(국민노총) 설립에 관여한 혐의로 이채필(62) 전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을 5일 기각됐다. 법원은 “현 단계에서 범죄의 소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이 전 장관이 전날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