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조선일보 기자
2005.08.28 14:10:41
‘기상 화약고’ 동아시아, 1000㎜ 비구름대 꿈틀
[주간조선 제공] 세계의 기상학자들이 근심스런 눈으로 한반도를 주목하고 있다.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의 증가로 지구 전체가 달아오르는 가운데,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의 온도가 가장 가파르게 뛰면서 불안정한 대기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지구촌을 통틀어 대기온도와 해수온도의 상승 속도가 가장 빠른 북서태평양 연안의 중고위도 지역에 위치해 있다. 미 해양대기국(NOAA) 인공위성의 관측에 의하면 우리나라 동해의 수온은 최근 17년간 1.5도 올라 세계 바닷물 평균 수온 상승치의 6배를 기록했다.(태양의 복사열이 똑같아도 고위도 지역의 온도가 더 많이 오른다.)
해수온도가 오르면 대기 중의 포화 수증기량은 증가하고 수증기가 증가할수록 대류권은 불안정해진다. 거꾸로 수증기가 없으면 날씨 변화도 없다. 한반도 상공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편서풍이 불고 있어 고도에 따른 풍속의 차이가 크다. 뭍과 바다, 남과 북의 기온 격차도 크다. 더구나 여름철 한반도는 수분을 잔뜩 머금은 동쪽의 북태평양 기단이 저온건조한 서쪽의 시베리아·티베트 산지의 기단과 충돌하는 경계에 위치해 있다. 가히 ‘기상의 화약고’로 부를 만한 여건이다.
무더운 북태평양 기단의 상승에 의한 강력한 비구름대, 수분 증발에 의한 국지적 사막화, 해수온 상승으로 고위도까지 펄펄 살아서 올라오는 태풍 등 극심한 악(惡)기상 조건을 모조리 꾸겨넣은 듯한 여름철 동아시아는 길게 뻗은 남북 해안선을 따라 세계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우리나라가 있다.
지난 7월 미 해양대기국이 “올해 6월의 지구 평균기온이 과거 30년 동안 6월 평균기온보다 0.64도 높았고, 사상 최고치였던 1998년(14.71도)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고 밝히자 한국의 기상학자들은 조심스런 어투로 “올 여름 최악의 홍수나 태풍이 우리나라를 강타할지 모른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서울대학교 대기과학과 허창회 교수는 “기온이 높은 해일수록 대기 중 수증기량이 증가해 대형 호우가 발생했다”며 “바다의 수증기가 많아지면서 태풍의 최대잠재강도(MPI)가 커지고 아주 강한 태풍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기상청은 지난 7월 22일 발표한 1개월 예보에서 “8월 중순과 하순에 저기압과 대기 불안정에 의해 지역에 따라 많은 비가 올 것”으로 예보하고 “금년 봄 티베트 산지의 적설량이 많아 여름철 대륙이 덜 따뜻해지면서 결과적으로 편서풍이 약화돼 중국 한국 일본에 집중호우의 가능성이 커졌다”는 중국과학원 자료를 인용했다.
북위 30~40도 지역 대류권 상층(지표면으로부터 11㎞)에 부는 편서풍이 약화되면 종종 강우전선을 고착시켜 대규모 폭우의 길을 열어준다. 과학자들은 태풍 루사가 전국을 유린한 2002년 8월 말에도 지금처럼 편서풍이 약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있다.
당시 태풍이 12시간이나 머물면서 엄청난 비를 뿌려댄 이유는 편서풍이 태풍을 동해로 몰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한국-일본 상공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속 200㎞의 편서풍이 불고 있는데 이 편서풍대가 약해지면 기상이변이 속출한다.
불안감은 7월부터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도 서부 뭄바이에 944㎜의 호우가 내려 1000여명이 사망했다. 7월 14일 중국 광시성, 광둥성, 푸젠성에 발생한 대홍수로 955명이 사망하고 가옥 70만채가 파괴됐다. 8월 들어선 우리나라에 집중호우가 잇따랐다. 2일과 3일, 전북 진안·임실·고창군에 1일 200㎜의 폭우가 내려 7명이 사망하고 1600채의 주택과 2만4000㏊의 농경지가 침수되었고 8일과 9일에는 경남 고성·사천·남해군에서 304.5㎜의 폭우가 내려 2명이 숨졌다. 10일에는 경기도 동부지역에 239㎜가 내려 주택이 침수됐다.
그러나 올 여름의 집중호우가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태풍이 오지 않았다. 계절은 대형 기상재난이 빈발했던 8월 말로 접어들고 있다. 특히 ‘8월 하순~9월 중순’은 초대형 태풍이 집중적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시기다.
2003년 매미(9월 12~13일), 2002년 루사(8월 31일~9월 11일), 2000년 프라피룬(8월 23일~9월 1일)과 사오마이(9월 3~16일), 1998년 예니(9월 26일~10월 1일), 1981년 애그니스(9월 1~4일), 1959년 사라(9월 15~18일) 태풍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 기록적 피해를 안긴 태풍은 대부분 여름의 막바지에 내습했다. 또한 서울, 경기, 강원, 충북 등 중부지방에 사상 최악의 홍수를 일으켜 소양강댐이 홍수위를 넘어서고 총 352명이 수마에 희생된 1990년과 1984년의 집중호우도 각각 9월 9~12일, 8월 31일~9월 4일에 발생했다.
기상학자들의 관심은 과연 태풍 루사가 영동지방을 초토화시킨 ‘1일 877㎜’라는 초특급 폭우가 재현될 것인가에 쏠려 있다. 기상관측 이래 최대 폭우인 877㎜는 강릉지방 연평균 강우량의 62%에 달하는 엄청난 비였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자원부의 김남원 박사는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김 박사는 “강릉에 내린 ‘1일 877㎜’는 수문학(Hydrology)에서 사용해온 가능최대강수량(PMP)이 실현 가능함을 보여줬다”며 “그러나 그것도 최대 강우는 아니며 한반도의 PMP 지도에는 남해안의 가능최대강수량이 990㎜로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최악의 경우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서 1000㎜에 가까운 집중호우가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PMP(Probable Maximum Precipitation)란 ‘댐을 지을 때 기준이 되는 최대홍수량을 산출하기 위한 최대 강우량’이다. 한 지역에 지금까지 내린 최대의 강수량과 앞으로 예상되는 최악의 강수량을 조합해서 산출한 예상치로, 향후 실제로 그런 비가 내릴 확률이 거의 없을 만큼 높은 수치라 할 수 있다.
건설교통부가 2000년 6월에 배포한 우리나라 PMP 지도에 보면 강릉의 1일 가능최대강수량은 840㎜로 예고돼 있다. “허수(虛數)에 불과하다는 PMP 측정치를 능가하는 비가 내렸을 때 등골이 오싹했다”고 수문기상학자들은 말한다. 이제 PMP가 모든 지역에서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도>에 나와 있듯이 남한에서 PMP가 가장 높은 곳이 영동지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도-순천-사천-마산의 남해안이 990㎜, 연천-파주-서울-안산이 930㎜, 소양강댐이 위치한 양구-화천-홍천이 강릉과 같은 840㎜ 등우선에 걸쳐 있다. 지도에 따르면 강원도 내륙과 경북 북부를 제외하면 우리나라 전역이 800㎜ 이상의 집중호우 가능지역이다. 수문학자들은 “강릉에서 PMP가 실현된 마당에 제2, 제3의 루사나 사상 최악의 대홍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엔 요즘 같은 집중폭우가 드물었다. 1960년대 이전까지 하루 100㎜ 이상의 폭우는 연간 2.7회에 불과했으나 최근에는 매년 10회 이상 나타나고 있다. 지난 50년간 남부지방의 강우량 관측에 따르면, 연 강수일수는 14% 감소했지만 연 강수량은 7% 증가해 ‘강수강도’, 즉 집중호우의 확률은 18%나 증가했다.
건설교통부의 ‘역대 홍수별 피해 순위’를 봐도 상위 65%가 최근 10년 사이에 발생했다. 1위는 2002년의 태풍 루사. 246명의 목숨과 5조1479억원의 재산을 앗아갔다. 2위는 1998년 619㎜가 내린 강화도(324명 사망, 1억2468억원 손실), 3위는 1999년 587㎜가 내린 파주(67명 사망, 1억700만원 손실)이다. 홍수보다는 해일 피해가 컸던 2003년 태풍 매미도 4조7800억원의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1~5위가 최근 7년 사이에 집중됐으며, 1998년 이후 수마가 비켜간 해는 2000년, 2001년, 2004년뿐이다.
이런 통계는 이제 집중호우가 더이상 기상이변이 아님을 말해준다. 한국은 세계적인 재난국가로 변하고 있다. 82개 회원국을 가진 국제대댐위원회(ICOLD)의 통계에 따르면 홍수피해에 따른 연간 사상자 수에서 한국은 평균 250명으로, 중국(2000~3000명) 인도(1500명)에 이어 3위를 달린다. 인구 대비로 따지면 단연 톱이다.<표 참조> 삼성지구환경연구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올해의 기상여건이 우리나라에 총 14회의 기상재해가 일어나 384명이 죽고 3만명이 집을 잃은 1998년과 흡사하다”며 “재난의 가능성을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위험을 빨리 감지하고 대비하기에 우리나라의 기상예보 인프라는 턱없이 열악하다. 기상위성도, 일본이 가진 3000톤급 기상선박이나 미 해군이 가진 기상항공기(태풍 발생지역으로 날아가 관측도구를 떨어뜨린다)도 없다. 기상청에 수퍼컴 2호기를 들여놓긴 했지만 수치모형 등의 소프트웨어를 만들 연구진이 부족하다. 대학에서 기상학을 연구하는 학생 자체가 적다.
장기예보는 신뢰성이 떨어지고 태풍이 발생하면 일본 기상청의 위성데이터를 보고 6시간마다 진행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유일한 대응책이다. 기상재해로 연간 수조원의 피해를 입는 나라치고는 너무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루사 직후 제주도를 방문해 “태풍센터를 짓겠다”고 했지만, 기상학자들은 “한 해 2억9000만원에 불과한 태풍예측팀의 예산을 10% 삭감한다는 얘기만 나돌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