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점수가 밥줄"…'고객갑질'에 우는 용역 A/S기사
by고준혁 기자
2016.11.24 06:30:00
전문가 "기사·노조 상호 평가 방법 등으로 개선해야"
| 삼성전자 에어컨 수리기사가 지난 8월 서울의 한 아파트 건물 외벽에 매달려 실외기를 수리하고 있다. (사진=전국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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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고준혁 기자] 지난 9월 인터넷 설치기사 김모(35)씨는 제대로 된 안전장치도 없이 서둘러 작업에 나섰다 목숨을 잃었다. 비 오는 날 전봇대에 올라가 개통 작업을 하던 중 감전 사고를 당했다. 실적 압박 탓에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었다. 앞서 지난 6월에는 가전제품 수리기사 진모(44)씨가 빌라 3층 외벽에서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하던 중 받침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추락해 결국 숨졌다.
인터넷설치, 가전제품 수리와 같이 업체와 개별 용역 계약을 맺고 일하는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 고객 민원이 들어오면 반성문을 쓰거나 심지어 급여를 삭감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고객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을의 갑질’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업체의 서비스정책와 소비자들의 잘못된 권리의식에 시달리면서도 고용이 불안한 탓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다.
서비스 만족도를 평가하는 고객 점수는 인사고과로 직결된다. 일부 업체는 급여에도 반영한다. 고객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수리기사 황모(29)씨는 낮은 평가 점수 탓에 퇴근 후 사무실에서 정신교육 수차례 받았다. 반성문을 쓰고, 관리직원에게 한시간 남짓 훈계도 들었다. 경고가 누적되면 감봉이나 정직 등 중징계를 받는다.
경고 2회 누적으로 9월 정직을 당한 그는 결국 직장을 나왔다. 황씨는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도 고장제품 수리가 쉽지 않거나 비용이 많이 들면 낮은 점수를 주는 고객은 늘 있기 마련인데 운이 없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황씨는 “유료 앱을 무료로 설치해 달라고 요구해 이를 거절했다가 0점을 받은 기사도 있다”며 “고객이 임의대로 약속 시간을 변경한 뒤에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낮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 설치기사 최모(32)씨는 6시면 사무실로 돌아와 그날 방문했던 고객들에게 ‘설치 서비스 만족도를 묻는 문자나 전화가 오면 좋은 점수를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최씨는 “ 고객 점수가 낮으면 급여를 깎는다”며 “서비스에 실망했다면 할말이 없지만 일부 고객들은 문자가 날아오면 귀찮다는 이유로 아무생각없이 낮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 문자로라도 부탁하면 신경을 써주니 아무래도 점수가 좋다”고 말했다.
설치·수리업체들은 그러나 건수·신속성·고객 점수 등의 항목별로 점수를 매겨 매월 ‘등급’을 평가한다. 대부분 건수나 신속성 등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탓에 결국 고객 점수가 등급을 가르는 결정적인 원인이다.
한 업체 관계자는 “1년차 이상인 기사들에게 설치 기술 등은 별 차이가 없다”며 “사실상 고객 점수가 등급을 결정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대다수 업체들은 최하 등급은 반성문 쓰기·자아비판 등 정신 교육을 실시한다. 경고를 주고 누적되면 정직 등 중징계를 내리거나 급여를 삭감하기도 한다.
| 한 인터넷 설치 기사가 고객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1점만 깍여도 월급이 차감된다”며 평가에서 만점을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사진=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위터 화면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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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한 관계자는 “업체별로 기준이 제각각이지만 보통 1점 차이에 따라 급여가 20만~30만원 정도 차이가 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고객 제일주의’ 문화가 왜곡된 방식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설명한다.
이남신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소장은 “카카오택시나 우버 택시처럼 기사도 고객에 점수를 매기는 ‘상호평가’ 방법을 도용하면 무분별한 고객평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정운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사를 고용한 업체가 고객 블랙리스트 데이터를 활용하는 방법 등으로 고객으로부터 받은 기사의 점수가 합리적인 것인지 2차적으로 검증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