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할아버지, 선물로 아빠 주세요"..독립PD사망 그후

by김유성 기자
2017.12.25 09:30:00

지난 7월 아프리카 촬영중 작고한 독립PD 유족 인터뷰
5개월 지났지만 슬픔은 여전..고인 유지 받아 '버티겠다'
정부 뒤늦게 나섰지만 외주제작 업계 '과연 바뀔까'

[이데일리 김유성 기자] “산타가 있나요? 돌아가신 아빠를 선물로 주세요.”

아빠 없는 첫 성탄절. 10살 딸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남편은 독립PD로 활동하다 지난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지 촬영 중 교통사고로 작고한 김광일 PD였다.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했다.

지난 21일 서울 오목교역 방송회관에 있는 PD연합회 사무실 안. 지난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연다큐멘터리 ‘야수의 방주’를 촬영하다 작고한 고(故) 박환성·김광일 PD의 유족들이 있었다. 같은 독립PD면서 이들을 도왔던 한국독립PD협회 송규학 회장과 복진오 전 권익위원장, 권용찬 대외위원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박환성·김광일 PD는 ‘갑’격인 방송사에 소속되지 않은 외주제작 PD다. 본인만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방송사에서 ‘주문’한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지에서 ‘야수의 방주’ 촬영중이던 박환성 PD 생전 모습 (독립협회 제공)
이중 박 PD는 일본 NHK와도 다큐멘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한바 있는 PD였다. 자연·환경 다큐멘터리 부문에서는 해외에서 인정받는 PD였다. 박 PD는 남아공 출국전 ‘야수의 방주’와 방영 계약을 맺었던 EBS에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불합리한 계약 관행에 대한 개선과 EBS의 입장 표명이었다. ‘을’ 격인 독립PD 입장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였다.

박 PD와 남아공 현지에서 작업했던 김광일 PD도 10년간 국내 외주제작 업계에 몸담았던 젊은 PD였다. 박 PD와의 작업이 마지막이라며 가족과 작별했던 김 PD는 이후 싸늘한 시신으로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촬영 강행군을 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박 PD와 함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날(21일) 만난 박PD의 동생 박경준 씨와 김 PD의 오영미 씨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사고 소식을 접했던 지난 7월 때보다는 안정을 찾았지만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은 여전했다. EBS와의 사고 수습은 합의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그간의 ‘앙금’은 남아 있었다.

박경준 씨는 박 PD가 운영했던 제작 스튜디오 법인 ‘블루라이노 픽처스’를 이어 받았다. ‘야수의 방주’ 다큐멘터리에 대한 후처리 문제, 박 PD의 평소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다.

박 씨는 “EBS와 유족 간 합의 사항은 법원의 조정에 따라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그러나 EBS와 블루라이노 간에는 진척된 게 업소 풀어나갈 숙제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박 PD는 남아공으로 떠나기전 2017년 6월 EBS에 공식적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EBS가 제작비 일부로 지원 받은 정부지원금을 귀속하겠다는 이유를 물었다. 자신을 계약 위반자로 몰아간 연유도 덧붙여 물었다.

현재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박 PD와 김광일 PD의 사망 보상에 대한 진척은 있지만, 박 PD가 운영하던 블루라이노와 EBS 간 분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김광일 PD의 미망인은 방송사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고 있다. 방송사 내 작가들이 느끼는 서러움을 달고 사는 이다. 방송 업계 ‘을’로 일하다 유명을 달리했던 남편의 죽음은 그래서 더 비통했다.

이런 그에게는 두 자녀가 있었다. 결혼 10주년, 10살·8살 남매다. 마냥 슬픔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 씨는 “아이들하고 힘내서 살자 버티고 있지만 그 자체로도 너무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먼저 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만은 감출 수 없었다.

“한 번은 남편이 꿈속에 나타났어요. 자기 잘 살고 있다면서.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었어요. 꿈속에서. ‘나 없이 잘 지내고 있지’라고 물어봐 ‘당신 없는데 누가 잘지내겠느냐’고 발끈했죠. 평소 함박웃음이었던 그가 낙담한 표정을 지었더라고요.”

아빠 없이 보내게 된 성탄절. 10살 딸아이의 말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더 크게 만들었다.

“알 것 다 알죠. 산타가 없다는 것도. 어느 날 물어보더라고요. ‘엄마 진짜 산타가 있을까’라고. 잠시 후 또 물어보고. 그런데 딸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로 아빠를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한 숨이 푹 꺼지더라고요. 할 말이 없었죠. 요새는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마음 속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이런 저런 상황을 생각하며 강하게 살아야겠다 버티고 있죠.”

지난 19일 정부는 방송 업계에 만연한 불합리한 외주제작 관행에 손을 대겠다며 정책을 발표했다.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5개 부처가 합동으로 브리핑까지 했다.

박환성·김광일 PD의 사망후 열악한 외주제작 업계 현실이 알려지고, 이낙연 국무총리까지 나서 대책을 촉구한 결과다. 독립PD들은 뒤늦은 정부 대책에 기대를 걸면서도 꼭 사람이 죽어야 정부가 나서는 현실에 대해 개탄했다.

송규학 독립PD협회 회장은 “이번에 내놓은 정부 대책에 우리가 요구했던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면서 “남은 것은 이들 대책이 잘 지켜지도록 관리감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변화의 속도는 굉장히 느릴 것 같다고 송 회장은 예상했다. 그는 “굉장히 멀 것 같다”며 “저작권을 귀속하고 송출료 항목으로 제작비에서 일부를 떼어가려고 하는 걸 당연하게 보는 것 자체를 방송사에서는 당연하게 본다”고 말했다.

제작사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태도 지적했다. 정부도 저작권은 제작사에, 방영권을 방송사에 돌아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송 회장은 “저작권을 가져가서 방송사가 수익을 창출하고 원저작자와 나눠가는 형태로 개선돼야 한다”며 “현실적인 문제는 그걸 가져가서 아무것도 안 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실제 박환성 PD와 EBS 간 갈등이 촉발된 계기 중 하나도 저작권이었다. 한경수 PD가 제작했던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도 비슷한 맥락의 사례다. 이전에 방송으로 제작했던 필름이 있었지만 저작권을 방송사가 소유하고 있었다. 한 PD는 처음부터 다큐멘터리영화용 촬영을 다시해야했다.

다만 권용찬 독립PD협회 대외협력위원장은 “이런 게 쌓이면서 변화를 준다면 미디어 생태계 환경도 변화하지 않겠는가”라며 “방송사가 생각하는 속도보다 플랫폼과 미디어 환경 변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