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아닌 경찰입니다]여경 13년차, '시그널' 차수현은 꿈이었다
by김보영 기자
2017.03.08 05:30:00
1:100 경쟁률 뚫고 일당백, 나는 여자 아닌 경찰
실종 치매 할머니 찾아준 여경에 반해 '경찰 되겠다' 목표
여경 중 95% 경위 이하 하위직..육아에 지쳐 경쟁서 도태
민원인들 "아가씨는 빠져" 무시하기 일쑤
경찰 되겠다는 딸, "이 아이가 컸을 땐 자유로울까" 고민
| tvN 드라마 ‘시그널’에서 장기 미제 전담팀 형사 차수현 역을 연기한 배우 김혜수씨. 사진=이데일리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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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보영 기자] 관내 집회 관련 보고서 작성을 끝내니 어느덧 시곗바늘은 오후 10시를 가리켰다. 저녁에 스파게티를 만들어 주겠다던 아이들과의 약속은 또 못 지켰다.
지난 2005년 처음 경찰복을 입었을 때 벅찼던 기억이 생생한데 어느덧 13년이 흘렀다. 우리 사회의 ‘파수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근무한 결과 경사까지 올랐지만, 8살 딸아이와 5살 아들에겐 늘 미안한 엄마일 뿐이다. 순경 시절 지구대 근무로 시작해 청문감사과, 형사과를 거쳐 지금은 정보과에 근무 중이다.
정보과에서는 관내에서 발생하는 각종 현안과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 출근 시간(오전 8시)은 있지만 퇴근 시간은 따로 없다. 집에 돌아갈 때마다 파김치가 되는 것도 문제지만 대신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시어머니 뵙기가 민망하다. 같은 경찰인 남편 역시 일에 치여 사는 탓에 육아는 온전히 시어머니 몫이 됐다.
고3 시절 당시 치매를 앓고 있던 할머니가 집을 나간 뒤 사라졌다. 그때 만난 여경은 눈물바다가 된 가족을 위로해줬을 뿐 아니라 새벽까지 동네를 샅샅이 뒤져 할머니를 안전히 모셔왔다. 경찰이 되겠다고 그 때 결심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2년을 노량진 고시촌에서 보냈다. 10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순경 시험에 합격한 날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합격자 50명 중 여성은 나를 포함, 단 3명이었다. 딸의 합격 소식에 부모님은 “기죽지 말고 좋은 경찰이 돼라”며 조용히 격려해 주셨다.
‘이파리 둘’ 계급장을 단 순간부터 지금까지 ‘민원인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는 경찰이 되겠다’는 꿈은 한결같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경찰 조직 내에서 여성이 살아남기가 녹록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11만명이 넘는 전체 경찰 중 여성은 1만 2300여명. 10명 중 1명 꼴이다. 이중 ‘경찰의 꽃’으로 불리는 총경급 이상 간부까지 오른 사람은 15명 뿐이다. 관리자급(경감 이상 경정 이하)도 6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95% 는 경위 이하 하위직이다. 강력계나 지능범죄 수사 등 핵심 부서에 배치되는 경우 역시 손에 꼽는다.
|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본부 앞에서 여경 기동대 단원들이 기동부대 지휘검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집회·시위 대비 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서울지방경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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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적기도 하지만 역시 육아가 가장 큰 적(敵)이다. 결혼과 출산 이후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 경쟁에서 자연스레 도태 당한 선배들을 수 없이 봐 왔다.
‘육아는 여성의 몫’으로 여기는 이 사회에서 근무시간이 불규칙하고 격무에 시달리는 여경이 일과 육아를 성공적으로 병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지난 밤 유치장에 여성이 입감되는 바람에 갑작스레 불려나가 밤새 야근을 했다.
마침 시어머니가 안 계신 상황에서 남편마저 당직근무 중이었다. 결국 잠든 아이들을 깨워 함께 경찰서로 갔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괜스레 눈물이 났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은 “애들을 봐서라도 좀 느슨한 부서로 옮기는 게 어떠냐”고 한다. 자기가 좀 느슨한 부서로 옮기면 안되는 건지….할머니 손에서 커가는 아이들을 볼 때면 ‘이렇게까지 하면서 경찰을 계속 하는 게 맞는 길일까’ 회의가 들기도 한다.
여경은 경찰로 보지 않는 민원인들의 태도에 힘이 빠질 때도 많다.
같은 제복을 입고 있지만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아가씨”라 부르거나 “여자는 빠져”라는 등 아무런 생각없이 던지는 말은 비수가 돼 가슴에 꽂힌다. 그때마다 약해지지 않으려 늘 ‘나는 여자가 아니라 경찰이다’고 마음 속으로 되뇌인다.
며칠 전 딸이 “엄마를 닮은 멋진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다.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딸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걱정이 밀려왔다.
내 딸이 경찰이 됐을 땐 과연 이런 고민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기사는 취재를 바탕으로 1인칭 시점에서 작성한 스토리텔링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