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최정희 기자
2011.01.23 10:00:00
외환위기 이후 국내4사 싱가포르 현물시세 변경
가격 경쟁력 잃은 수입사 몰락..4사 독과점구조 구축
[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휘발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유류세와 함께 정유업계의 독과점 구조가 가격 책정에 일부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 정유 업계는 SK이노베이션(옛 SK에너지(096770)),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OIL 등 4개사가 전체 시장의 8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4사 독과점 구조를 깨고 진입 장벽을 낮추면 자연스럽게 경쟁이 벌어져 가격이 낮아질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결국 소비자들의 관심사는 국내 정유사들이 어떻게 독과점 구조를 구축했고, 이를 깨면 기름 값을 내릴 수 있을지 여부에 모아지고 있는 셈이다.
국내 정유업계가 독과점 체제가 된 데는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석유제품의 가격 선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97년 석유시장이 자유화되면서 정부의 고시 가격제가 없어져 정유사들은 자율적으로 제품 가격을 정할 수 있게 됐다.
이 당시 정유사들이 가격 기준으로 삼은 게 바로 원유(두바이유) 가격이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원유 가격 기준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시아 지역의 석유제품 수요가 줄면서 휘발유, 경유 등 제품 가격이 급락한 것이다.
급기야 2000년 상반기 이후부터는 국제 시장에서 휘발유가 원유보다 더 싸게 거래되는 가격 역전 현상이 불거졌다. 타이거 오일 등 수입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국(싱가포르 현물시장)에서 원유보다 싼 석유 제품을 대거 들여와 주유소 등에 뿌리기 시작했다. 국내 정유시장은 타이거 오일 등 20여개 석유업체들이 등장하면서, 이들 수입업체들의 시장 점유율이 7%에 육박할 정도였다.
당시 원유가를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하던 정유사들은 수입사들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특히 정유사들은 영업 손실과 함께 수입업체보다 더 비싼 가격에 석유제품을 판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비난까지 뒤집어쓰게 됐다.
이에 따라 정부와 업계는 국내 석유제품 가격도 원유가가 아닌 국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제품 가격 변화에 맞춰 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2001년 6월부터 싱가포르 현물 시장 가격(몹스, MOPs)이 정유사들의 가격 기준으로 변경됐다.
국내 정유사들이 싱가포르 현물 시장 가격 기준으로 변경되면서 타이거 오일 등 수입업체들은 일제히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고, 결국 시장에서 퇴출됐다. 이때부터 국내 시장은 4개 대형 정유회사 중심의 독과점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수입업체 몰락은 소비자가 더 싼 석유를 살 수 있는 선택권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게 정부 안팎의 시각이다. 실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초 국제 유가는 40~50 달러대를 유지하면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보였지만 싱가포르 현물시장은 이보다 20~30달러 높게 형성된 바 있다.
이 당시 국내 휘발유 가격은 국제 유가는 안정세를 보였지만, 싱가포르 현물시장 가격이 높게 형성되면서 비교적 높은 가격을 유지해 유가 안정에 따른 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정유사는 원유(두바이유)에, 수입업체는 국제 시세에 가격이 연동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국내 소비자들은 더 싼 가격의 석유제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일부에선 예전 시스템으로 환원하거나 정유사들이 두바이유로 가격 기준으로 바꾸는 것을 유도하면 석유 수입업체가 다시 생기면서 정유사들의 독과점 구조가 완화될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미 두바이유가 급등하는 상황에서 예전 시스템으로 환원하는 것 자체가 실효성이 없다는 게 중론이다.
21일 기준으로 두바이유는 배럴당 93달러를 넘어선 상태로, 싱가포르 상품시장에서 거래되는 휘발유 가격인 배럴당 104달러와 큰 차이가 없는 상태다. 원유를 들여야 정제 비용 투입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싱가포르 현물이 가격 경쟁력은 더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국내 정유사들은 석유제품의 60%를 국제 시세에 맞춰 수출하는 상황에서 국내 공급가격은 두바이유에, 수출가격은 싱가포르 현물가격에 맞출 경우 시장가격 왜곡 현상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설령 두바이유에 연동해 국내 공급가격을 책정한다고 해도, 실제 휘발유 가격이 싸지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즉 원유를 들여야 정제하면 휘발유, 정유 등 14종의 석유제품이 한꺼번에 나오는 데, 각 제품은 수요에 따라 가격 책정이 달라진다.
정제비용이 같다고 해도 실제 시중에서 팔 때는 수요가 적은 제품의 손실까지 잘 팔리는 제품에 얹을 수밖에 없어, 휘발유 가격이 결코 싸지지 않을 것이란 게 정유업계의 설명이다. 수입업체가 생긴다고 해도 이미 규모의 경제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갖춘 국내 정유사들의 공세에 밀려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