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86亞게임부터 평창올림픽까지…`韓체육 산증인` 백성일씨
by정재훈 기자
2020.09.07 05:11:00
백성일 대한체육회 전 사무차장 인터뷰
85년 입사, 34년 근무…위원장만 9명 모셔
부산아시안게임·월드컵 유치 비화도 밝혀
'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가장 감격
"우리나라 스포츠 발전 위해 노력할 것"
[이데일리 정재훈 기자] 우리나라가 개최한 첫번째 대형 국제스포츠 이벤트였던 1986서울아시안게임부터 2018평창동계올림픽까지, 지금 소개하는 이 카페지기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 국내 몇 없는 올림픽훈장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백성일 전 사무차장.(사진=정재훈기자) |
|
대한체육회 입사 당시부터 이미 유치가 확정됐던 86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말단 실무자로 뛰어다니며 정신이 없었지만 그 이후 국내에서 열린 2002부산아시안게임과 2002한일월드컵에 이어 평창동계올림픽은 유치부터 개최까지 속속들이 참여하면서 그야말로 한국 국제스포츠 역사의 산 증인이다.
지난 34년간의 체육행정인으로서의 역할을 내려놓고 고향인 경기도 양주시의 한적한 곳에서 테이블 10개 정도의 조용한 카페를 운영 중인 백성일(61) 대한체육회 전 사무차장 이야기다.
백 전 차장이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전세계를 아우르는 인적네트워크는 여전히 정부는 물론 서울시 등 지자체들에게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만큼 여전히 전국을 돌면서 스포츠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다.
바쁜 중에 시간을 내 준 것에 감사하다고 인사한 기자에게 백 전 차장은 소탈하게 웃으며 “카페를 오픈한지 4개월여 정도 됐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손님도 거의 없다”며 “시간 많으니 얼마든지 찾아와서 이야기 나누자”고 제안했다.
백 전 차장은 의정부 경민중학교와 의정부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1983년 졸업해 당시 잘 나가던 국제상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2년만에 회사가 문을 닫는 시련을 겪었다.
스포츠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처, 자식을 먹여살려야 해 1985년 대한체육회에 공채로 입사했다. 그렇게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정년퇴직까지 34년.
백성일 전 차장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이 4년에 한번씩 열리는 만큼 체육인들 사이에서는 한 사이클을 4년 이라고 표현하는데 체육계에선 ‘4년은 일 해야 어느정도 체육계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는게 통설”이라며 “그런데 나는 이 한 주기를 8번 돌면서 그 사이 총 9명의 대한체육회장을 모셨다”고 말했다.
대한체육회 입사 8년차이던 1993년,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신임 대한체육회장으로 임용된 김운용 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자신을 비서실장으로 내정한 것.
30대 초반인 어린 나이에 비서실장직을 맡기가 부담스러웠던 그는 대한체육회를 그만두기로도 결심했지만 김운용 전 부회장의 카리스마에 비서실장 자리를 수락하고 9년 동안 그를 모셨다.
IOC부위원장을 맡았던 김운용 대한체육회장을 옆에서 보좌하다 보니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늘 중심에 있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체육계 인사들과 청와대를 찾아 기념촬영했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사진=정재훈 기자) |
|
백 전 차장은 대한체육회 입사 이후 유치가 결정된 2002년의 부산아시안게임과 한일월드컵에 공개되지 않았던 비화를 소개했다.
그는 부산아시안게임과 한일월드컵 유치는 정부의 외교력과 대한체육회의 국제스포츠네트워크 역량, 현대와 삼성 등 대기업의 물, 불을 가리지 않은 물밑 지원 때문이라고 전했다.
백성일 전 차장은 “부산아시안게임은 대만의 아시안게임 유치를 반대하고 나선 중국의 몽니 덕에 부산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통상적으로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 총회는 아시안게임 유치 후보 도시가 있는 국가에서는 열리지 않는데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유치를 결정한 1995년 총회는 서울에서 열려 부산으로 결정이 났다”며 “투표 역시 비밀투표가 원칙이지만 중국이 주도해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거수투표로 진행, 마치 사전에 모든 각본이 짜여져 있었던 것 처럼 거의 모든 국가가 부산에 표를 줬다”고 설명했다.
백 전 차장은 총회 현장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수백여명 대만 국민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좋지 않다.
한국 축구역사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2002한일월드컵 유치의 뒷 이야기도 소개했다.
백성일 전 차장은 “1996년 모리셔스에서 열린 FIFA(국제축구연맹) 총회에서 한국과 일본의 공동개최가 최종 확정되기 36시간 전 FIFA의 결정을 당시 사마란치 IOC위원장으로부터 내가 직접 전화를 받아 알았다”고 털어놨다.
월드컵 유치 후발 주자였던 우리나라가 공동개최를 위해 대통령까지 나섰다는게 백 전 차장의 전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사마란치 IOC위원장을 초청해 월드컵 공동개최에 힘을 써달라며 간절히 부탁하면서 일이 성사된 것이다. 월드컵 개최지를 결정하는 FIFA집행위원 대부분이 IOC위원이라는 점을 감안, 김영삼 대통령이 사마란치 IOC위원장을 선택한 셈이다.
월드컵의 공동개최 공식 발표 전 이를 먼저 안 사람은 김영삼 대통령과 당시 체육 관계부처 장관, 김운용 대한체육회장 그리고 김 회장의 비서실장이었던 백성일 전 사무차장 뿐이었다.
두번의 실패 끝에 201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확정지었다.
백 전 차장은 “글로벌 스포츠계에 밑바닥 네트워크를 확보한 대한체육회와 삼성 등 기업인들은 각 국의 체육인들을 크로스체크하는 방식으로 의견을 물은 결과 거의 대부분 국가들이 평창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현지에 파견된 유치위원들 사이에선 500달러를 걸고 우리가 몇표 차이로 유치를 확정할 것인지 내기를 할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런 백 전 차장에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확정 보다 더 큰 기쁨은 국기인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이었다. “199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에 힘을 보탤 수 있었던 것은 34년 체육행정가로서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기쁜일”이라는 백성일 전 사무차장.
백 전 차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시범종목으로 올림픽에 참여했지만 국기인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승격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기쁨”이라며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열린 태권도 종목 경기를 지켜보다가 눈물을 왈칵쏟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의 스포츠 발전에 힘쓴 덕에 그는 대한체육회 직원으로는 최초이자 국내에 몇 안되는 올림픽훈장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각 국 올림픽 현장을 누비다 현지에서 사 모은 열쇠고리를 어루만지고 있다.(사진=정재훈기자) |
|
2032년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는 서울시는 물론 아시안게임 유치에 연합해 도전하는 충청권. 뿐만 아니라 여러 지자체와 정부, 몸 담았던 대한체육회까지.
백성일 전 사무차장은 비록 현직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체육인으로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백 전 차장은 “사실 아내와 한적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 카페를 열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커피를 마시러 오는 손님이나 있겠냐”며 “일주일에 1~2회 정도 스포츠 관련 회의에 참석해 내 경험을 전달해 지역과 정부의 스포츠 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경기 관련 부위원장으로 파견 근무를 하고,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도 1년을 넘게 평창에 남아 여러 후속 지원을 펼친 백 전 차장.
백 전 차장은 “우리나라 빙상의 메카나 다름 없던 의정부지만 지금은 잠시 주춤한 것 같아 아쉽다”며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컬링경기장은 물론 태릉빙상장을 대체할 시설 유치에도 힘이 닿는데까지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향에 다시 내려온 만큼 백 전 차장은 자신이 나고 자란 의정부와 양주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서도 힘을 쏟겠다는 입장이다.
백성일 전 차장은 “비록 현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우리나라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나의 경험을 내놓을 준비가 됐다”며 “스포츠를 통한 남북교류는 물론 한·중·일 스포츠협력 등 여러 방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