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장 벤처에 ‘차등의결권’ 추진…깐깐한 조건에 실효성 의문

by김호준 기자
2021.02.16 05:00:30

정부, '1주당 10개' 의결권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추진
상장 시 보통주 전환 등 제약 많아 실효성 의문
정치권, 이달 중 차등의결권 법제화 논의 전망
"차등의결권, 상장 이후도 유지해야…세부 내용은 기업에 맡겨야"

[이데일리 김호준 기자] 차등의결권 도입은 기업형 벤처캐피탈(CVC)과 함께 벤처업계 숙원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차등의결권을 통해 상장 이후에도 창업주가 경영권 희석 우려 없이 과감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이 지난 2004년 차등의결권주식 발행으로 창업주 지배권을 유지하며 회사를 키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 온라인쇼핑몰 쿠팡이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된다. 쿠팡은 12일(현지시간)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를 통해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을 위한 신고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신천동의 쿠팡 본사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정부와 여당도 지난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차등의결권 도입을 추진해왔다. 지난해 12월 중소벤처기업부는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1주당 10개 의결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은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상법이 정한 ‘1주 1의결권’ 원칙을 유지해 왔다.

이번에 정부가 제출한 개정안에는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가 1주당 의결권이 최대 10개인 복수의결권주식을 보유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대규모 자금조달이 필요한 시점에서 지분희석을 우려해 필요한 만큼 투자를 안 받거나 유예하는 상황을 줄이기 위해서다. 중기부 관계자는 “비상장 벤처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받아 유니콘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지분 희석에도 안정적인 경영을 할 수 있도록 복수의결권을 도입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차등의결권이 벤처기업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린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지난달 중소기업연구원은 ‘복수의결권 도입이 벤처기업 연구개발 투자에 미치는 영향 분석’ 보고서에서 “벤처기업 대주주 지분율이 30~50%인 구간에서 추가적인 지분율 1%포인트 상승이 벤처기업 R&D 투자액을 최대 540만원까지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차등의결권 도입으로 벤처기업 대주주가 안정적인 지분율을 유지하게 되면 R&D 투자를 확대, 기업 성장도 가속화한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정부의 차등의결권 도입안이 지나치게 제약이 많다는 점이다. 정부는 대기업 악용과 경영주 사익추구 등 차등의결권 남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1주당 의결권 10개 이하 △존속기간 10년 △상장 후 보통주 전환 등 구체적인 요건을 개정안에 명시했지만, 막상 벤처업계에서는 이러한 규정으로 오히려 실효성이 낮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비상장 벤처기업 복수의결권 도입 관련 벤처기업법 개정안 주요 내용. (자료=중기부)
무엇보다 업계에서는 차등의결권주식의 보통주 전환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다고 지적한다. 차등의결권주식의 존속기간은 최대 10년으로 제한되고, 3년 유예기간을 뒀지만 상장 후에는 남은 기간에 상관없이 보통주로 전환된다. 반면 미국에서는 공모가액 상위 10위권 신규 상장기업 중 10곳 중 7곳은 차등의결권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회사법에서는 주식 의결권 수에 대한 규제가 없으며, 정관 규정으로 차등의결권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10년이라는 복수의결권주식 존속 기간을 정해뒀음에도 상장 후 3년이라는 별도 소멸 기간을 정해둔 것은 과도한 규제”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사의 보수나 감사의 선임 및 해임, 이익배당에 관한 사항 등 주요 사안을 결의하는 경우에 1개 의결권만 갖도록 해 차등의결권 행사를 제한한 점 역시 문제라는 지적이다.

유니콘 육성을 위해 출범한 초기 중소기업 전용 주식시장 코넥스(KONEX) 상장사나 벤처기업인증이 없는 기술혁신형(이노비즈)·경영혁신형(메인비즈) 중소기업이 적용 대상에서 빠진 것도 지적된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벤처인증을 받은 기업은 전체 중소벤처기업의 1%에 불과한데, 벤처인증이 없는 혁신형 강소기업은 소외당할 수 있다”고 했다.

벤처업계에서는 차등의결권 세부 규정을 법에 담기보다 기업 정관에 담는 등 자율에 맡기는 쪽이 실효성이 높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장 후에도 당장의 이익보다 창업주를 중심으로 성장해야 하는 기업이 많은 만큼, 차등의결권 도입 자체도 구성원들에게 선택권을 주자는 의미다. 유정희 벤처기업협회 혁신벤처정책연구소 부소장은 “국내에도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벤처기업이 많기 때문에 차등의결권이 도입되면 이를 적용하려는 기업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라며 “상장 후에도 차등의결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업 자율에 맞겨야 한다”고 말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주주들의 동의가 있다면 차등의결권은 상장 이후라도 유지하는 것이 맞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은 이달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차등의결권 법안 심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방침이다. 현재 정부안과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영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차등의결권 도입 법안들이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최근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장기 주식보유 주주에 대해서도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자고 주장하며 도입에 힘을 싣는 모양새다. 중기부 관계자는 “정부가 제출한 벤처기업특별법 개정안을 포함해 차등의결권 관련 여러 법안이 올라와 있다”며 “이달 임시국회가 열리면 여러 각도에서 법제화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