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침묵의 봄…제주4·3은 왜 이름이 없을까?
by정다슬 기자
2018.03.31 10:00:00
| △제주4·3평화공원기념관에 놓여있는 백비.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의미를 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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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제주4·3평화공원기념관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하얀 비석이 놓여있다. 백비(白碑),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항쟁·폭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제주 4·3’은 아직 그 사건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규정되지 못한 채 그저 ‘사건’으로만 불리고 있다.
이름은 존재를 의미한다. 광주항쟁, 광주학살, 광주민주봉기 등으로 불리던 5·18은 긴 시간을 들인 헤게모니 싸움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쟁취해냈다. 제주4·3사건 역시 침묵을 깨고 그 이름을 찾아야 할 때다.
제주4·3사건은 오랫동안 금어(禁語)였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30여년 만인 1979년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으로 처음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두환정부는 현 작가를 보안서에 끌고 가 고문을 하고 소설도 금서로 지정했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일까지 당시 제주도민의 9분의 1에 달하는 3만명이 죽었다. ‘빨갱이’라는 이유에서다.
제주도민은 빨갱이였을까. 제주4·3사건이 일어난 결정적 사건으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방투쟁이 꼽힌다. 350여명의 무장대는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과 인사를 공격했다. 4월 3일 하루 동안 경찰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행방불명됐고 6명이 다쳤다. 우익인사는 8명이 숨지고 19명이 상처를 입었다. 무장대는 2명이 죽고 1명이 생포됐다.
처음에는 치안상황으로 간주했던 미 군정(美 軍政)은 저항이 심화되자 점점 강경 진압에 나선다. 특히 당시는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항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5·10선거를 앞둔 상황이었다. 미 군정은 이 선거를 해방 3년사의 정치과정에 대한 국내외의 최종 평가를 담은 중요한 사건으로 인지했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저항과 제주도민들의 자발적·비자발적인 거부로 전국 200개 선거구 가운데 제주도 북제주군 갑 선거구와 을 선거구 등 2개 선거구만이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미 군정이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인식하게 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국 1948년 6월 23일 재선거를 성공시키기 위해 미 군정은 6사단 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5월 중순께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이 외국의 전투현장이 현지 군대가 아닌 미군을 진압 책임자로 파견한 것은 유례가 없다.
브라운 대령의 제1임무는 6·23 재선거의 성공이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4·3사건의) 원인은 전혀 모른다. 나의 임무는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차별적인 검거로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5000여명의 주민이 유치장에 갇혔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으면서 재선거는 무기한 연장됐다.
제주도민은 왜 이토록 남한정부의 수립을 반대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당시 제주도가 놓인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제주는 해방 후 정치적·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에 놓여 있었다. 일본 등 타지로 떠났던 제주도민이 돌아오면서 인구는 해방 전해인 1944년 21만명에서 1946년 27만명으로 6만명 가까이 늘어난 반면 태평양전쟁 이후 산업시설 파괴로 경제는 빈사상태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 1946년 6월부터 8월까지 제주도 전역을 덮친 콜레라는 2여개월 동안 369명의 사망자를 냈고 1946년 보리는 흉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는 인민위원회를 통해 자체적으로 사회를 재건하고 있었으나 미 제59군정중대가 해방 후 3개월이 지난 11월 9일 제주도에 진주하면서 미 군정 시대가 열렸다.
처음 제주도 인민위원회와 미국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고 전해진다. 1945년 전남군정청 정보국장에 근무한 그랜트 미드(E. Grant Meade)은 자신의 저서 ‘주한미군정’에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 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며 “완전 독립적으로 도의 관리역할을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미 군정이 친일파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면서 제주도민의 불만은 점점 커지게 된다. 특히 1947년 4월 10일 극우인사인 한독당 농림부장 출신 유해진을 제주도지사에 임명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에 유해진은 서북청년단을 제주도로 데려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제주도민의 민심은 점점 미 군정과 멀어졌다.
여기에 1947년 3월 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열린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사망자 가운데는 초등학생과 부녀자도 있었고 일본에서 가족을 데리러 왔다가 변을 당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어떠한 사과나 책임자 처벌도 하지 않았다.
제주도는 분노했다. 결국 3월 10일 민·관 총 파업이 일어났다. 이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경무부장 조병옥은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으며, 제주도 사건은 북조선 세력과 통모하고 미 군정을 전복해 사회적 혼란을 유치하려는 책동을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4·3 무장봉기와 5·10 선거, 6·23 재선거의 실패 등 중요한 사건마다 군·경의 진압의 강도는 높아졌다. 이 시점에서 제주도 작전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의 14연대가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에 앞서 9연대장 송요찬은 10월 17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내륙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포했다.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다.
그러나 포고령은 통신수단 미흡으로 중산간 마을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남은 주민들은 ‘공비’나 ‘폭도’로 분류됐다. 군·경 토벌대의 무차별적인 강경 진압이 전개되고 19349년 3월까지 5여개월 동안 참혹한 방화와 학살이 진행된다. 대부분이 이 시기에 죽었다. 영화 ‘지슬’의 배경이 된 서귀포시 동광리 무등이왓 마을에서 당시 11살 소녀였던 홍춘호(81) 할머니는 최초 학살이 일어났던 48년 11월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순경들이 연설을 할 테니 남자들만 모이라고 하더라. 어떤 순경은 오늘 나오면 죽는다고 하고 어떤 순경은 나오라고 하는데, 결국 10명이 모였다. 근데 당시 발이 빨랐던 임정승 아저씨는 분위기가 이상하니 대나무숲으로 뛰어서 살았고 나머지 아홉 사람은 꼼짝없이 죽었다. 그 근방에 있던 사람도 걸려 총 10명이 죽었다. 총소리가 들려서 나와보니 피가 벌게…그 뒤로 한 달 뒤 마을이 불타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집을 버리고 도망갔다”
| △제주4·3평화기념관에 재현된 다랑쉬굴의 재현현장. 토벌대를 피해 굴 속에 숨었다가 사망한 제주도민들의 유골과 생활도구가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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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기념관에는 제주도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다랑쉬굴에 숨어 살던 당시 흔적들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1992년 4월 44년 만에 발견된 이 굴에는 11구의 시신과 그들이 사용했던 솥, 항아리, 사발 등 생활도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시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질러 이들을 질식시켰다. 유골을 수습하러 왔던 마을 주민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현장이 발견되자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금어의 역사가 얼마나 길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아무도 입에 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제주4·3사건은 2000년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비로소 공론화된다. 이어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제주4·3사건에 정부 차원에서 공식사과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4·3사건은 제주도민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군사정권은 제주4·3사건은 ‘북한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하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폭동의 가족’으로서 연좌제를 적용했다. 제주도민 가운데서도 어떤 이는 살기 위해 마을 사람을 제보하고 어떤 이는 그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한 마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있는 상황에서 제주도민은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제주4·3사건이 오랫동안 공백으로 남아져 있던 이유다.
오랫동안 제주4·3사건을 취재해온 허호준 한겨레 기자는 “제주4·3사건은 민간인에 대한 공권력의 엄청난 학살”이라고 말한다. 반면 이여숙 제주4·3사건 문화해설자는 5·10선거 당시 투표가 무효처리된 북제주군 갑·을 선거구가 교육열이 높고 고학력자가 많았다는 것을 언급하며 “제주도민의 의지가 담긴 항쟁”이라고 말했다.
당시 11살의 어린 나이로 4·3사건을 겪은 홍 할머니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자녀에게도 자신의 겪은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그는 이제는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을 돌며 자신이 겪은 일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당시 부모를 모두 잃고 젖먹이 남동생을 훌륭하게 키운 그녀의 목소리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오래 살고 보니 좋다 좋다. 이런 얘기도 마음껏 하고…” 침묵했던 제주4·3사건이 서서히 목소리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