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끄덕끄덕] K드라마, 이러다 다 죽어

by송길호 기자
2024.03.21 06:15:00

“제가 작품을 왜 많이 안할까요?” 유튜브 채널 <요정재형>에 출연한 고현정은 정재형에게 되려 그렇게 물어본다. 그러자 정재형은 아마도 대부분의 대중들이 생각했을 답을 한다. “너무 골라서?” 당연한 일 아닐까. 고현정이다. 기성세대들에게는 ‘귀가시계’라고도 불렸던 <모래시계>의 주인공이었고, 주인공보다 더 강력한 존재감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선덕여왕>의 미실이었던 고현정. 하지만 엉뚱하게도 고현정은 작품을 많이 안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안들어와요.”

농담처럼 툭 던진 이야기처럼 보이고, 특히 그건 고현정 개인적인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건 또한 최근 드라마업계의 불황과도 무관하진 않다. 최근 배우들 중에는 “작품이 없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신동엽이 진행하는 웹예능 <짠한 형>에 출연했던 김하늘의 이야기 속에서도 업계의 이런 분위기가 읽힌다. “예전에는 작품이 많이 들어왔고 쉬게 해달라고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작품 수도 많이 줄어 대본 하나 하나가 너무 소중하다는 걸 느낀다”고 한 것.

대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언뜻 고현정이나 김하늘 같은 배우들이 작품 수가 줄었다는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오징어 게임> 이후 연일 K드라마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들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게다가 한때 <태양의 후예>가 130억 제작비를 들여 KBS로만은 충당하기 어려운 부분을 해외 투자로 해결했던 시절의 이야기는 이제 옛 일이 되었다. <오징어 게임>이 253억으로 넷플릭스에 1조 2000억원 규모의 경제적 수익을 불러 일으킨 후, K콘텐츠의 위상과 영향력은 높아졌고 그래서 투자되는 제작비도 껑충 뛰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는 시즌1,2를 통틀어 총 700억 대작으로 회당 제작비가 35억원 이상이 투입됐고, 역시 넷플릭스에서 방영될 한재림 감독의 첫 시리즈 <머니게임>은 회당 제작비가 30억 원에 이른다. 디즈니+에서 공개 예정인 송강호 주연의 시리즈 <삼식이 삼촌>은 10부작에 400억 원이 투입됐다. 회당 제작비가 무려 40억 원에 달하는 셈이다. 올해 공개될 것으로 알려진 <오징어 게임2>는 주연 출연료를 제외한 제작비만 1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도됐다. 이제 1천억 원대 K드라마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솔솔 피어 나오고 있다. 이런데 불황이라고?

현 드라마업계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목소리는 지난 1월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의 간담회를 통해 쏟아졌다. 여러 이유들이 겹쳐져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슈는 앞서 K드라마의 위상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는 최근 몇 년 사이 수직상승한 드라마 제작비다. 제작비가 오른다는 건 그만큼 K드라마에 대한 투자가 많아졌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건 투자비를 감당하고 회수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나 디즈니+처럼 글로벌 동시 소비될 수 있는 플랫폼을 갖고 있고 이를 통해 자금 회수가 가능한 OTT들이라면 제작비의 상승과 이를 통한 완성도의 제고 그리고 글로벌 위상이 높아지는 선순환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 글로벌 망을 갖추지 못한 토종OTT들이나 이제는 레거시 미디어가 되어가고 있는 방송사들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글로벌 망을 통한 원활한 회수와 소비가 불가능한 경우, 제작비 상승은 그 자체로 부담이 된다. 작년 토종OTT들이 일제히 자체 제작 오리지널 드라마 편수를 줄인 건 그간 투자 대비 회수가 되지 않음으로써(한편으로는 구독자를 선점하기 위한 과열된 투자로 인해) 누적된 적자 폭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었다. 방송사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최근 지상파, 케이블, 종편의 드라마 편성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KBS가 수목드라마 편성을 없앴고, SBS와 MBC도 금토를 빼놓고는 드라마 편성 시간대에 예능 프로그램을 채웠다. tvN도 수목드라마를 비웠고 JTBC 역시 간간히 수목드라마 편성을 변칙적으로 하긴 해도 거의 금토 시간대에만 드라마를 채우는 상황이 됐다.



제작비 상승에서 과거부터 항상 이슈가 됐던 주연배우의 출연료 문제는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서는 한때 회당 1억원도 많다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회당 4억원은 기본이고 6억, 7억원까지 급상승했다고 토로했다. 드라마 한 편에 주연 출연료로만 100억이 들어간다는 건 사실상 드라마 제작을 하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물론 이건 일부 글로벌 시장에서도 먹히는 톱배우들의 이야기다. 이렇게 주연급 출연료가 천정부지로 올라, 사실상 드라마의 완성도를 채워주는 조연급을 줄여 캐스팅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주연 출연료에 대한 쏠림이 작품 전체의 완성도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일부 주연배우들에 제작비가 과도하게 쏠리고, 그들의 출연료를 감당할 수 있는 일부 글로벌 OTT들로 작품이 쏠리면서, 여기서 배제된 배우들이나 제작사들은 정반대로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작년 토종OTT가 적자를 줄이기 위해 제작하다(심지어 제작이 완료된 작품들조차) 편성을 취소한 작품들이 창고로 들어갔고 이로 인해 도산 위기에 처한 중소 제작사들도 생겼다. 이건 연쇄 도미노로 이어진다. 거기 출연한 배우들과 제작 스텝들까지 줄줄이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일거리가 없어진 배우들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예능 프로그램에 쏠리는 또 다른 도미노도 이어진다. 이렇게 되면 예능인들이 이제 연쇄적으로 밀려나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전체 K콘텐츠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한만큼 현 드라마업계의 위기를 가볍게 봐서는 안되는 이유다.

그저 쉽게 ‘넷플리스 때문’이라거나 몇몇 고액출연료를 받는 ‘배우들 때문’이라는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논의도 아니고 거의 논란에 가까운 이런 이야기들은, 당장 ‘누구 탓’을 해서 동네북을 만들기는 쉬워도 문제 해결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그렇게 해서는 어떤 해결책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손놓고 있을 게 아니라 이 문제를 공론화해서 글로벌 시대로 접어든 K콘텐츠 상황에 맞는 새로운 가이드라인들을 도출해야 한다. 배우들도 결국 작품이 협업의 산물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상생의 길을 고민해야 한다. 글로벌 OTT들도 이 사태를 강건너 불구경할 게 아니라 협업 상대로서 진지한 국내 제작사들과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저 <오징어 게임>처럼 시장 경쟁에만 던져 놓고 보다간, “이러다 다 죽어”라는 그 말을 실감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