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의 문화재 읽기]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는 왜 조선시대 쓰였나

by김은비 기자
2020.12.28 06:00:00

고려시대엔 당대 역사서 제작 안돼
"절대적 권력가진 왕조, 당대에 기록하기 어려워"
원사료 그대로 수록...객관·신뢰성 높게 평가

‘고려사’ 규장각(청구번호5553) 표지(사진=문화재청)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고려시대 전체 역사를 담은 ‘고려사’가 최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고려시대 역사서로는 최초다. 고려시대 대표적 국보·보물은 ‘대방광불화엄경’(국보 제204호) 등 대다수가 불경이다. 문화재청 측은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선시대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 등이 모두 국보·보물로 지정된 상황에서 ‘고려사’ 역시 국가지정 문화재로서의 평가가 필요했다”고 지정 이유를 밝혔다.

왜 ‘고려사’는 다른 시대 역사서에 비해 늦게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일까. 박수희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연구관은 그 이유를 “‘고려사’의 소장자 측에서 지난해가 돼서야 국가지정문화재 신청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행 국가지정문화재 절차상 소장자가 직접 보물, 국보 지정 신청을 해야 문화재청에서 심의에 나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외에도 ‘고려사’가 주로 비교되는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당대 기록이 아닌 후대에 편찬된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 평가에서도 다소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사’는 조선시대인 15세기에 옛 왕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기 위해 처음 간행됐다. 1449년(세종 31) 세종이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명해 ‘고려사’ 편찬을 시작했다. 2년 뒤에 완성됐지만 1454년(단종 2년)에 널리 인쇄·반포됐다. 고려시대에는 당대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제작되지 않았다. 고려말 문신인 이제현(1287~1367)과 안축(1282~1348) 등이 편찬을 시도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명으로 정도전(1342~1398), 정총(1358~1397) 등이 ‘고려국사’를 편찬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박 연구관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왕조가 존속하고 있는데 그 시대 역사를 평가하고 기록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조선시대에 편찬된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처럼 당시에 역사를 기록한 것은 흔치 않았다.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도 삼국시대가 저물고 난 뒤인 고려시대 들어서 제작됐다.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 23년) 김부식 등 학자들이 왕명을 받아 편찬했다. ‘삼국유사’는 1281년(충렬왕 7년) 편찬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만큼 당대에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따라서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지키기 위해 만전을 기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실록을 기록했던 사관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은밀한 사생활, 왕의 공과까지도 낱낱이 기록했다. 따라서 왕조차 생존해 있는 동안 사관의 기록을 열람하는 것이 금지됐다. 사초(역사기록의 초고)를 본 사관은 내용을 누설할 경우 중죄에 처했다. 세종은 사초를 수정할 시 참형에 처한다는 법을 마련하기도 했다.

‘고려사’는 비록 조선시대 제작됐지만 고려시대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고려시대 원사료를 그대로 수록해 사실 관계의 객관성과 신뢰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실제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려시대 묘지명 자료가 실제로 고려사 열전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고려 문물과 제도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수록돼 있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고려사’는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동아대석당박물관 소장 ‘고려사’(목판본) (사진=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