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 성지 런던을 가다]②금융 강국 영국, 핀테크 성지로 변모중
by김유성 기자
2018.03.08 06:03:00
런던 내 제2 금융 중심지 카나리워프 방문
대형 은행들과 핀테크 스타트업이 한 자리에
세계화된 핀테크 스타트업 생태계 꾸려
[런던(영국)=이데일리 김유성 기자] 영국 런던의 스타트업 창업 열기는 뜨거웠다. 제조업 강국의 위치는 지난 20세기에 잃었지만 대신 21세기 핀테크 중심 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각오가 역력했다. 규제에 유연한 영국 정부, 대형 금융 기업들이 모여있다는 환경, 각국 인재가 모이는 영어권 중심지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지면서, 런던은 핀테크의 성지로 떠으로 있었다.
영국 런던의 신시가지 격인 ‘카나리워프(Canary Wharf)’는 런던 금융가로부터 5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19세기 분위기가 완연한 런던 중심가와 달리 카나리워프는 신시가지의 모습이었다. 아침이면 10만명이 이 곳으로 출근한다. 수십층 규모의 대형 빌딩 곳곳에 ‘JP모건’, ‘HSBC’ 등 대형 은행의 이름이 내걸려 있었다.
‘시티오브런던’으로 불리는 런던 중심가가 19세기 대영제국의 상징이라면 카나리워프는 21세기 영국의 희망을 상징한다. 금융 중심지에서 세계 핀테크 중심지로 변모하고 잇는 ‘영국의 미래’다.
스타트업 입주·엑셀러레이터(보육) 공간 ‘레벨39’은 카나리워프에서도 중심 격인 ‘원캐나다스퀘어(One Canda Square)’에 있다. 레벨39이란 이름은 ‘이 건물 39층에 있다’는 뜻에서 비롯됐다.
| 스타트업 창업 공간 ‘레벨39’이 있는 원캐나다스퀘어(중앙). 양 옆으로 HSBC와 씨티은행 사옥이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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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9의 안에 들어가니 창업열기가 한여름만큼이나 뜨거웠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카페테리아가 눈에 들어왔고, 각 테이블마다 젊은 창업가들이 모여 토론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켠에서는 노트북을 펼쳐 놓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창 밖으로는 카나리워프의 전경이 펼쳐졌다.
| 레벨39 내 카페테리아. 전세계 48개국 250여 스타트업이 모이는 공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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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한 카페테리아를 지나 공동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일에 한창 몰두 중인 창업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각 책상마다 전원선이 놓여 있었다. 사전에 예약한 정해진 자리에 앉아 일하는 곳이다. 대개 1인 창업자 혹은 3인에서 5인 정도 되는 소규모 스타트업이 그룹을 이뤄 일하고 있었다.
직원 수 수십명의 스타트업은 24층이나 42층에서 별도의 공간을 쓴다. 이곳은 그들만의 사무실로 나뉘어 있다. 스타트업의 수준을 뛰어넘은 유니콘들이 모여 있다. 얼핏 한국내 창업 보육 공간과 비슷해 보였지만 주변 기업들과 별개로 창업 공간만 덩그러니 있는 우리와는 크게 달랐다.
벤 브라빈 레벨39 CEO는 “스타트업과 같은 초기 기업들은 네트워크를 맺는 게 중요하다”며 “이곳은 글로벌 네트워크는 물론 수 십억달러 자금을 운영하는 금융 기업과도 활발한 교류가 가능하다”고 자신했다.
실제 레벨39에 입주한 스타트업은 250여개로 이들의 국적은 전 세계 48개국에 달한다. 워낙 외국 국적이 많다보니 오히려 런던 본토박이 스타트업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다. 스타트업 생태계마저 EPL(세계 최고 인기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영국 프로축구 1부리그)처럼 세계화시킨 것이다.
주변에 ‘큰 손’ 격인 대형 은행이 많다는 점도 강점이다. 바클레이스, 씨티그룹, 크레딧스위스, EY, 신용평가사 ‘피치’, JP모건, KPMG, 메트라이프, 무디스, 모건스탠리, 도이체뱅크, S&P글로벌, 톰슨 로이터,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빠지지 않고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대형 은행과 금융 기업들은 스타트업을 통해 새 사업 기회를 엿본다. 스타트업은 이들과 손잡고 세계로 나갈 수 있다.
브라빈 CEO는 “세계적인 IT강국이자 스타트업 진흥에 힘을 쏟고 있는 한국과와도 협력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또 그는 “IT 인프라가 최고 수준이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한국을 아시아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싶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는 “레벨39도 한국 스타트업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레벨39의 또다른 강점은 민간 주도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예산을 들여 단기 성과를 보려는 한국과 다르다. 정치 논리가 아니라 시장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도 바뀌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영국 정부는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데 집중한다. 또 전에 없던 서비스를 실험하고 싶을 때는 규제프리존(규제샌드박스)을 활용할 수 있게 적극 돕는다. 규제샌드박스는 신산업, 신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제품, 서비스를 내놓을 때 일정 기간 동안 기존의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시켜주는 제도이다. 영국에서 핀테크 산업 육성을 위해 2014년 처음 시작됐으며 문재인 정부에서도 규제개혁 방안 중 하나로 채택했다. 사업자가 새로운 제품, 서비스에 대해 규제 샌드박스 적용을 신청하면 법령을 개정하지 않고도 심사를 거쳐 시범 사업, 임시 허가 등으로 규제를 면제, 유예해 그동안 규제로 인해 출시할 수 없었던 상품을 빠르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한 후 문제가 있으면 사후 규제하는 방식이다.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모래 놀이터처럼 규제가 없는 환경을 주고 그 속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한다고 해서 샌드박스라고 부른다.
이 규제 샌드박스는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가 관리한다. 우리나라고 치면 금융감독원 혹은 금융위원회 격이다. 특이한 점은 금융감독원 격인 FCA조차 민영화돼 있다는 점이다. 정부 기관이지만 형태는 민간 기업 모습이다. 다수의 FCA 직원들은 은행 등 민간 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업계 내 개선점과 진흥 방법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공무원과 업계 간 소통이 자연스럽다보니 현장 기업인들은 FCA를 감독 관청이 아닌 조력자로 본다. 런던 내 또 다른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인 스타트업부트캠프의 캐서린 드보르킨 디렉터는 “FCA는 기존 산업과 스타트업이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 지 방법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그는 “새 사업 모델을 현실 사회에 검증하는 데 있어 FCA가 설정한 규제샌드박스는 유용한 도구로 작용한다”고 평가했다. 핀테크 스타트업이 부담해야할 법률 서비스 비용을 FCA 내 규제샌드박스에서 자문 받고 이를 통해 비용까지 절감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금융위원회는 규제 샌드박스에 대해 ‘금융 혁신 유발에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레벨39은 영국 정부가 런던의 제2금융 중심지로 개발한 카나리워프 중심 건물 39층에 입주한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이자 창업 공간이다. 런던 부동산 개발 기업 카나리워프그룹이 운영하고 있다. 핀테크를 포함해 리테일, 보안 등의 스타트업을 보육하고 있다. 2013년 3월에 설립됐으며 원캐나다스퀘어 내 3개층 7432제곱미터(약 2250평) 크기의 공간을 사용 중이다. 2018년 2월 기준 250개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