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당선)샐러리맨 신화에서 '경제대통령'까지

by김수연 기자
2007.12.19 21:05:38

[이데일리 김수연기자]

▲ 한나라당 경선 기자회견

이명박 당선자는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대중들을 만날때마다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 이야기와 가난했던 어린시절, 또 그것을 공부로 극복했다는 것 등이다.
 
가난, 현대건설과 정주영, 서울시장 등은 당선자의 궤적을 가장 빨리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다. 그의 삶은 개발시대 한국사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한몸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자 이충우씨의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45년 가족이 일본에서 아버지 고향인 경북 포항으로 이주했다. `찢어지게` 가난해 온식구가 단칸방에서 지냈고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웠다고 당선자는 회고한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김밥, 풀빵 등을 팔면서 장학금을 받아 포항중학교와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다.

대학 진학은 꿈도 못꿀 형편이었지만 청계천 책방에서 헌책을 얻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독학하며 시험을 준비해 19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합격만 하면 못 다녀도 중퇴"라는 생각으로 시험을 봤다고 한다.

막상 합격하자 이웃들의 도움으로 이태원 시장에서 환경미화원 자리를 구해 학비를 벌면서 학교를 다녔다.

이런 성장과정으로 인해 당선자는 "교육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극복한 사람이 바로 저"라고 수없이 말한다.

1964년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으로 6·3한일회담반대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6개월간 복역했다.

당선자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어머니는 이때 출감 한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선자는 "어머니 생전에 새 옷 한벌 못해드린 것이 그렇게 후회스럽다"고 두고두고 말했다.

어렵게 자랐고 밑바닥에서 안해본 게 없다는 당선자이지만, 서민적인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청중에게 가난을 이야기할 때 그의 화법 속에서 빈곤은 전적으로 개인에 달린 문제고, 개인이 극복할 대상으로 형상화한다. 사회구조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일은 드물다. 이를 두고 "자신이 겪은 가난의 본질에 공감하는 게 아니라, 가난을 극복한 자기 스토리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던 정신과의사 정혜신씨의 분석은 유명하다.


대학을 마치고 65년 현대건설에 공채로 입사했다. 입사하면 해외에 보내준다는 광고에 끌려 지원했다고 한다.

입사 5년만에 이사가 됐고 12년 만인 77년 사장 자리에 올라 88년까지 현대건설 사장을 했다. 이 기간 인천제철과 한국도시개발(현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도 겸임했다. 88년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자리에 올라 92년까지 현대맨으로 살았다.
 
▲ 현대 시절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함께


태국서 회사 금고를 지켰다는 것 등 `샐러리맨 신화`를 구성하는 에피소드들이 이때 탄생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상당 부분 부풀려지고 또 윤색된 이야기들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건설 시절의 모습은 1995년 민자당 국회의원이던 시절 출간했던 자전에세이 <신화는 없다>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어쨌든 당선자가 현대에서 성공가도를 질주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현대건설 이사 시절인 1970년 부인 김윤옥씨를 만나 결혼했다. 



2002년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재기하고 이어 대선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이명박의 정치인생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92년 14대 총선때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14대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이 '샐러리맨의 영웅'을 영입한 것이지만 내심으론 당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창당한 국민당을 겨냥한 측면도 강했다. 현대가와 멀어진 것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다.

95년 지방선거 당시 여권 핵심부가 지원한 정원식 전 총리에 맞서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경선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무소속 출마를 고려하다 막판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만류로 포기했다.

정치인으로서 첫 절정기는 96년 15대 총선. 정치 1번지인 종로에 출마,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였던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및 청문회 스타였던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고 당선 직후 법정 선거비용 초과 등 선거법 위반에 따라 재판이 시작돼 결국 98년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당선자는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객원연구원 생활을 한다. 집권 이후까지 여진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BBK와 얽힌 것도 이때가 계기가 됐다.

2001년부터 언론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인터넷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금융사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이를 접고 서울시장 출마 준비에 들어가고 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돼 화려하게 복귀했다.
 
▲ 3기 민선시장 재직시 서울광장에서


정치인 이명박은 보수진영 정치인 중에서는 거의 최초로, 이념이나 노선보다 스타일로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들의 공허한 말에 지친 사람들은 '일하는 국가CEO'라는 그의 이미지에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지자를 결정했다.

 
샐러리맨 출신 치고 당선자의 혼맥은 매우 화려하다.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재계 출신 정치인인 작은 형 이상득 국회 부의장과 딸의 혼사를 통해 삼성·LG·대림 등 우리나라 대표 재벌가와 연결된다.

당선자의 작은 형인 이상득 부의장은 코오롱그룹 사장(1979~1983)을 거쳐 1988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사무총장·최고위원 등을 거치며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이상득 부의장은 부인 최신자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뒀는데, 장녀 성은씨가 구자두 LG벤처투자 회장의 아들 구본천 LG벤처투자 사장과 결혼했다. 당선자는 작은 형인 이상득 부의장을 통해 LG가와 사돈관계인 셈이다. 

LG가와의 혼맥을 통해 다른 재벌가와도 멀리 연결된다. 이 후보의 사돈인 구자두 회장의 셋째형은 자학씨다. 자학씨의 부인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 회장의 딸 숙희씨다. 또 구자두 회장의 여동생 자혜씨는 대림그룹 창업자 이규덕 전 회장의 며느리다. 당선자는 삼성·대림가와 멀게나마 인척이 되는 셈이다. 

▲ 이명박-김윤옥 부부


당선자 부인 김윤옥씨는 공무원이었던 김시우씨와 최덕예씨 사이에 3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현재 이 후보의 '차명재산' 의혹을 둘러싸고 언론에 자주 이름이 나오는 김재정씨는 윤옥씨의 막내 남동생이다. 
   
당선자 부부는 슬하에 장녀 주연, 차녀 승연, 3녀 수연씨와 막내 아들 시형씨 등 1남 3녀를 두고 있다. 주연·승연씨는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기악을 전공했고, 수연씨는 이화여대 미대를 나오는 등 모두 예술을 전공했다. 외아들 시형씨는 국제금융센터에 취직했다가 그만두고 '위장취업'등 구설수에 오르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세 딸은 모두 결혼해 전업주부다. 큰 사위이자 주연씨의 남편인 이상주씨는 현재 삼성화재 법무담당 상무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 부산지검 등에 근무하다 2004년 삼성화재로 자리를 옮겼다. 

둘째 사위인 최의근씨는 서울대 의대 내과 전문의다. 최씨 부친인 최윤식 서울대 의대 교수는 국내 의학계에서 순환기내과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3녀 수연씨는 2001년 9월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과 결혼했다. 조 부사장은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차남이다. 효성가(家)는 SK, 고려산업 등 국내 재벌가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봉서 전 부총리 등 정·관계에 걸쳐 막강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당선자는 효성가와 사돈을 맺어 멀리나마 정·재계 쪽과 혼사로 연결됐다.
 


수차례의 TV토론 등에서 나타났듯이 당선자는 표현이 유려하거나 청산유수 말솜씨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어눌한 말 속에서도 표현방식이나 내용은 거침없고 직설적이다. 농담도 곧잘 하지만, 부적절한 용어나 주제 선택 등으로 인해 몇차례 구설수에 오르자 선거 기간중에는 가급적 농담을 자제하고 말수도 줄였다.

승부욕이 대단하고, 도전적 기질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저서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에는 "60여년 간 한 번도 안락한 길을 걸은 적이 없는 것 같다..편안한 길을 걸을 때마다 모험과 도전의 길을 걸을 때의 열정과 긴장에 대한 나의 기질적인 선택이 그러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이런 기질을 밝히기도 했다.

테니스 등 구기운동을 좋아하는데, 운동을 할 때는 상대의 나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악착같이 이기려고 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 오랜 건설회사 경영자 경력 때문인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밀어붙이는데는 이골이 났다는 평이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기업인에게 '일'은 곧 '결과'이고 '효율' 은 가장 중요한 가치다. 현대라는 살벌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몸으로 익힌 철학일 수 있다. 하지만 목표 달성에 이르는 동안의 부작용이 가볍게 취급되는 등의 이면도 필연적이다. 설득과 공감의 리더쉽 보다는 목표제시형 리더십에 가까운 것으로 분류된다.



▲41년 12월 19일생 ▲경북 영일(포항) 출신 ▲동지상고·고려대·미국조지워싱턴대학 객원연구원 ▲현대건설·인천제철 등 현대계열사 10개사 대표이사 회장 ▲6.3동지회 회장 ▲14·15대 국회의원 ▲세계수영연맹 집행위원 ▲미국 아칸소주 명예대사 ▲아태환경NGO 한국본부 총재 ▲민선 3기 서울시장 ▲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사 fDi 선정 2005 올해의 인물 ▲저서: 신화는 없다,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온몸으로 부딪쳐라,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어머니 ▲부인 김윤옥씨와 1남 3녀

▲학력 사항 
- 1954 포항 영흥초등학교 졸업
- 1957 포항중학교 졸업
- 1960 동지상업고등학교(야간) 졸업
- 1965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1998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박사
- 1999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객원연구원
- 2004 서강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 2004 카자흐스탄 국립유라시아대학교 명예박사
- 2005 몽골국립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 2005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경력
1965 현대건설 입사 (공채)
1977~8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1978~81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 겸임
1978 한국도시개발(現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사장 겸임
1978 한국철강협회 부회장
1980 해외건설협회 업계대표 부회장
1980 한국원자력산업회의 업계대표 부회장
1981~92 대한수영연맹 회장
1981~92 대한알루미늄 대표이사 사장 회장 겸임
1982~87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 겸임
1982~92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
1982~92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82~92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1983~92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1983~92 해외건설협회 이사
1983~90 동남아 경제협력 건설분과 위원장
1984~92 아시아수영연맹 회장
1984 세계수영연맹 집행위원
1985~86 한라건설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6~99 주한부탄왕국 명예총영사
1987~92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8~92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1988~92 현대엔진공업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8 한무쇼핑(현대백화점)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9~92 한·소 경제협회 설립준비위원장 겸 부회장
1989~91 현대종합목재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90~92 현대자원개발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90~92 한국항만협회 이사
1991~92 동북아 경제협력 민간협회 한국측 회장
1992~95 14대 국회의원(민자당→이후 신한국당, 전국구)
1992~94 6.3동지회 회장
1992~현 미국 아칸소주 명예대사
1993~96 한국청년실업인협의회 회장
1993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 겸 운영이사회장
1994~2002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1995 삼청로터리클럽 회장
1996~98 15대 국회의원(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 서울 종로)
1996 한국국악협회 고문
1997 한나라당 종로지구당위원장
1999~2002 아태 환경NGO 한국본부 총재
2000~현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2000~02 한국장애인정보화협의회 명예회장
2001~현 해외한인무역협회 고문
2001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분과 위원장
2002~06 서울특별시장(32대, 민선3기)
2002~06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2007 한나라당 제 17대 대통령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