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으로 뛰어라’…위기를 예고한 노벨상의 '선견지명'

by김성훈 기자
2023.04.01 11:30:00

[위클리M&A]
자본시장 찾아온 연쇄 뱅크런 사태
대대적인 할인 안간힘 끝 진화 국면
'큰 우려 없다' 메시지도 무용지물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뱅크런' 조명
노벨위원회의 올해 선견지명 관심

[이데일리 김성훈 기자] “도대체 언제 문 여는 거야…”

사람들이 초조하게 시계를 쳐다본다. 개점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입구 앞에 모여든 구름 인파는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려 발을 동동 구른다. ‘일단 사기만 하면 되팔아서 웃돈을 두둑이 챙길 수 있는 뭐라도 나왔나?’ 싶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은행 앞이다. 개점 시간에 맞춰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입구로 몰려든 이들은 은행 창구를 향해 소리친다.

요즘에야 컴퓨터로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예금 인출이 가능하다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은 국내에도 있었다. 지난 2011년 2월 17일 부산 해운대구 부산2저축은행에 예금자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은행에서 단기간에 예금에 대한 대량의 인출요구가 일어나는 사태를 말하는 ‘뱅크런’(Bank-run)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요즘에야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예금 인출이 가능하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은 국내에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11년 2월 17일, 부산2저축은행 해운대 지점에는 수백 명의 고객이 들이닥쳤다. 미쳐 지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고객들이 은행 입구를 빼곡히 막아섰다. 당시 부산저축은행그룹 관계사인 부산·대전저축은행 영업정지 소식에 놀라 달려온 예금자들이었다. 정부가 원금을 보장하는 5000만원 이하 예금자까지 인출 요구가 쏟아지면서 대기표 1000장이 순식간에 동났다.

부산저축은행그룹에서 시작된 뱅크런은 정상영업을 하던 90여개 저축은행으로 번져나갔다. 그 결과 2010년 말 76조원에 달했던 예금은 2012년 32조원까지 쪼그라들었다. 추산하기로만 10만명 넘는 피해자가 발생한 전무후무한 국내 뱅크런 사례였다.

이른바 ‘자본시장의 경고등’으로 불리는 뱅크런 사태가 최근 미국을 넘어 유럽으로 번지고 있다. 유망 기업에 대출을 일으켜주고 이들 기업의 투자금을 예치하는 특수목적은행인 실리콘밸리은행(SVB)가 파산하면서다.

지난해 말 기준 자산규모가 1754억 달러(230조원)에 달하던 SVB가 하루아침에 고꾸라진 이유는 뱅크런 때문이었다. 위기를 감지한 예금주(대부분 스타트업)들이 투자금을 일제히 찾았고, 한꺼번에 몰린 예금 인출을 내어줄 여력이 없던 SVB는 결국 파산이라는 결론을 맺었다.

미국 외신 보도에 따르면 SVB 파산 직전 이틀간 고객들이 빼 가려 한 예금 규모는 약 185조원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SVB 전체 예치금의 81%를 이틀 만에 내어줬어야 했다는 얘기다. SVB 은행 전경 (사진=AFP)
최근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 외신 보도에 따르면 SVB 파산 직전 이틀간 고객들이 빼 가려 한 예금 규모는 약 185조원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클 바 연방준비제도(연준·Fed) 부의장은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있었던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기존에 알려진 인출액 420억 달러(약 54조6천억원)에 더해 파산 당일 1000억 달러(약 130조원) 규모의 인출 시도가 추가로 있었다고 밝혔다. SVB 전체 예치금의 81%를 이틀 만에 내어줬어야 했다는 얘기다.

SVB 사태 초기만 해도 미 금융당국은 공적자금을 투입해서라도 SVB 사태를 막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SVB발(發) 중소형 은행 연쇄 파산 우려가 커지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은행들이 파산해도 공적자금을 투입할 것이냐는 지적을 외면하면서 “전체 금융위기로 퍼질 가능성은 적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와중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기반 중소은행인 퍼스트 시티즌스 뱅크셰어스(퍼스트 시티즌스)가 SVB를 인수하면서 급한 불을 껐다. 퍼스트 시티즌스는 약 720억 달러(93조7000억원) 규모의 SVB 자산을 165억 달러(21조5000억원) 할인된 금액에 인수하기로 했다. 다만 약 900억 달러(약 117조원) 규모의 증권과 여타 자산은 FDIC(연방예금보험공사) 법정관리 대상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약 23% 수준의 대대적인 할인에다 인수에 적잖은 부담을 동반하는 증권 자산은 남겨두는 제안이 인수로 이어졌다.

스위스도 SVB 후폭풍을 거세게 맞았다. 세계 7위 규모 투자은행(IB)인 크레디트스위스(CS)의 지난해 보고서에 적혀 있던 ‘중대한 결함’이라는 문구에 회사가 휘청였다. 다행인지 아닌지 UBS가 CS를 인수하며 파산 우려는 또 한번 일단락됐다. 큰 위기를 막아 안도할 수도 있지만, 안도의 대가를 뜯어보면 생각해볼 여지가 없진 않다.

피인수 직전 시가총액이 10조원에 육박하던 CS가 4조원 남짓한 가격에 UBS로 넘어갔다는 점이 그렇고, 스위스 당국이 유동성 공급 목적으로 최대 90억 스위스프랑(약 12조700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점이 그렇다. 미국이나 스위스나 은행 파산 리스크를 막기 위해 전에 없던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반대로 SVB와 CS를 인수한 원매자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득 되는 장사를 했다. ‘우리 요구조건 안 들어주면 인수안 해’를 몇 번 시전 하니 꿈도 못 꿀 혜택을 추가로 얻어내서다. UBS만 하더라도 시가총액 대비 60% 가까운 디스카운트에다 13조원 가까운 정부지원 유동성을 약속받았다. 오랜 기간 스위스 자본시장 내 라이벌로 꼽히던 UBS와 CS를 떠올려 본다면 UBS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비즈니스를 했다.
202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1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뱅크런과 은행 연쇄 파산을 보면서 문득 지난해 10월 스웨덴에서 있었던 결정이 생각났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그해 10월 10일 벤 버냉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과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 필립 디비그 워싱턴대 세인트루이스 교수 등 3명을 2022년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

수상 이유를 보면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노벨위원회는 “은행과 금융위기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선정했다”며 “1980년대 초 이들의 연구가 우리 경제에서 은행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줬고, 특히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은행의 줄도산을 막는 게 왜 중요한지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한때 미 연준의 수장이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버냉키 선임연구원 얘기를 좀 더 해보자. 그는 지난 1983년 발표한 논문에서 1930년대 뱅크런이 은행 파산을 초래해 대공황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이론적으로 제시했다. 버냉키 이론의 핵심은 ‘뱅크런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가 촉발한 현상’이라는 점이다. 뱅크런으로 금융 위기가 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시장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후에 나오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노벨위원회가 머지 않아 글로벌 자본시장에 일어날 일을 예견이라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상은 돌고 돈다지만, 뱅크런 이론 적립과 연구로 노벨상을 수여한 지 5개월 만에 뱅크런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은 생각해 볼 여지가 적잖다. 더욱이 뱅크런이 금융위기의 시작이 아닌 악화의 산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한편으로는 노벨 경제학상으로 시장에 간접적인 경고를 했지만,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자본시장의 아둔함을 목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어쩌면 이 사태에 직면한 금융당국 관계자 책상 어딘가에는 이들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논문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7개월 후 받게 될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올해 노벨위원회가 제시하는 선견지명을 무심코 지나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봄의 문턱 어느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