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흡혈귀…우리네 인생 그대로네

by김미경 기자
2015.11.05 06:15:30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
김나정 작가 동명희곡 뮤지컬로
2010년 연극 이후 5년만
연말까지 대학로 SH아트홀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의 한 장면(사진=네버더레스).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새빨간 입술, 밤을 지배하는 매혹적인 ‘흡혈귀’와는 거리가 멀다. 아등바등 사는 생계형 흡혈귀만 있을 뿐이다.

오는 12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SH아트홀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갑’이 아닌 ‘을’이다. 피를 먹으며 불멸을 얻는 것을 제외하고는 폭등하는 집값에 좌절하는 우리네 모습과 닮았다. 폐장을 앞둔 변두리 유원지 ‘유령의 집’에서 비정규직 알바생으로 근근이 살아가는가 하면 부업으로 뜨개질을 해 부족한 살림을 채우는 식이다.

신춘문예 단편소설(2003)과 희곡(2010) 부문에서 당선한 경력이 있는 김나정 작가의 동명희곡이 원작이다. 2010년 동명연극으로 먼저 공연을 했고, 이번에 뮤지컬로 옮겨졌다. 이용균 연출과 김혜영 작곡가의 손을 거쳐 소극장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김 작가는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보면 등장인물이 죽어 있는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올라타지도 못하고,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고 현재를 불안해하는 그런 인물들”이라면서 “거기서 모티브를 땄다. 체호프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인간과 흡혈귀가 무엇이 다를까’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무한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흡혈귀도 오늘날 이 땅에 살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것이 많더라. 흡혈귀 ‘아냐’가 고층아파트를 사려면 37년을 꼬박 일해야 한다.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이러니한 팍팍한 삶을 흡혈귀에 빗대어 이야기를 하면 더 잘 드러날 것 같았다.”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의 한 장면(사진=네버더레스).


작품은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에서 쫓겨나 한국의 한 놀이공원 ‘유령의 집’에 얹혀사는 흡혈귀 가족이 주인공이다. 어머니 소냐는 TV중독이고, 아들 바냐는 놀이공원 사장의 부인 미봉을 짝사랑한다. 딸 아냐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헌혈차와 빛을 피할 수 있는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하지만 놀이공원이 문 닫을 위기에 처하자 궁지에 몰린다. 흡혈귀가 거꾸로 인간에게 고혈을 빨리는 상황이 이어진다.

“A형은 밍밍해 싫다. 톡 쏘는 B형을 달라” “높데캐슬에서 살고 싶다” 등 웃음을 유발하는 재치 있는 대사와 중독성 있는 넘버가 연속적으로 터진다. 배우 김도빈, 문혜원, 진아라, 이지호, 김대곤 등의 연기도 맛깔스럽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는 진한 잔상을 남긴다. 코믹하면서도 슬프다.

김 작가는 “아마 관객은 작품을 보고 나서 망연자실해 사는 게 뭘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운이 빠지거나 살기 싫어진다는 게 아니라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다른 존재에 대한 애잔함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의 한 장면(사진=네버더레스).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의 한 장면(사진=네버더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