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반세기)경제개발계획 시동②

by이종석 기자
2005.05.05 12:40:40

62년부터 35년간 7차에 걸쳐 진행
60~70년대 고도성장 이끈 "실행파일"

[edaily 이종석기자] 5.16 혁명정부가 풀어야 할 가장 화급한 과제는 경제문제였다.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풀어야 했고, “앞으로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비젼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혁명지도부는 경제문제 해결을 혁명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이슈로 간주했다. 혁명정부는 민주당에서 만들었다가 사장된 5개년 경제개발계획안을 토대로 ‘경제재건계획’을 급조, 혁명 후 2개월 만인 7월22일 경제기획원 신설과 함께 발표한다. 경제 비젼 제시는 당시 그만큼 화급한 과제였다. ◇ 의욕이 앞선 제1차 경제개발계획 경제재건계획이 시달되자 각 부처별로 소관부문의 계획을 작성하느라 분주했다. 하지만 장기개발계획을 작성해 본 경험이 없는데다 군사정권의 성화에 못 이겨 일단 계획안만 만들어 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자연히 계획안은 엉성했고 치밀하지 못했다. “그 때는 군인들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라 계획의 적합성 보다는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에 목표를 둔다는게 기본 방침이었습니다. 여기에 혁명정부 정책과 민주당의 계획안 등을 혼합해서 개발계획을 만들다보니 내용이 다소 엉성했지요.“(‘경우’ 87년 4월호) 당시 상공부 화학과장을 맡았던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도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다. “5개년 계획으로 공장을 지어야 한다는데 별안간 무슨 공장을 어디에 지어야 할 지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해 산업은행 조사월보를 가져와 수입일람표를 훑어보면서 수입금액이 많은 것들을 추려보니 결국 의식주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우선 이런 공장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개년계획 치고는 정말 엉성하고 주먹구구식이었지요”(영욕의 한국경제) 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라도 경제개발계획이 정식 가동에 들어갔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한 하다. 박정희 정권은 계획안만 만들어 놓았다가 결국 실행하지 못하고 사장시켰던 자유당, 민주당 정권과 달리 경제개발계획을 정부안으로 공식화하고 구체적인 실행에 나섰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 착수와 관련 “구 정권때 10년을 두고도 궤상(机上)의 안으로 서랍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이 계획안은 장래 성공여부 보다도 우선 안을 완성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국가와 혁명과 나) 새로 출범한 경제기획원은 각 부처별로 올라온 부문별 계획안을 통합해 정책논리를 개발하고 계량화하는 작업을 거쳐 그해 9월15일 5개년개발계획 최종 시안을 마무리했다. 기획원 창립과 동시에 5개년계획 작성 지시를 받은 지 불과 2개월만의 일이었다. 경제기획원이 만든 5개년개발계획안은 최고회의에 이송돼 3개월간의 심의를 거쳐 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으로 최종 확정, 공표된다. 비로소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첫 기적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 미국의 냉담한 반응과 1차계획의 수정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시행 첫 해부터 커다란 시련에 봉착한다. 그동안 원조경제를 주도해 온 미국이 사전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5개년개발계획에 냉담한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미 정부는 “성장율을 너무 높게 잡았다” “제철소 건설은 힘들다” 등등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았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버거와 미 대외원조처(USOM) 킬렌 처장 등은 한국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워싱턴에 보고했다. 연평균 GNP성장률을 7.1%로 잡은 것은 현실을 무시한 과도한 의욕에 불과하며, 5년간 24억달러 상당의 외자를 조달하겠다는 계획도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했다. 미국 정부의 이 같은 부정적 시각은 박 정권에 대한 자금지원 거부로 극명하게 표출됐다. 특히 63년 3월 군사정부가 군정 연장 방침을 발표하자 미국의 반응은 더욱 냉담해졌고, 그 결과는 AID원조자금 축소로 드러났다. 한미간 마찰이 심화되면서 혁명정부는 미국으로부터의 자금조달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경제개발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박 정권으로서는 생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한 셈이었다. 대외 자금조달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가운데 일기불순으로 작황마저 나빠지면서 국내 경제상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1차 개발계획 시행 첫 해인 62년도의 경제성장율은 2.2%에 머물렀다. 반면 의욕적인 투자에 따른 역작용으로 물가는 오름세를 지속했으며, 외환보유고는 1억달러를 밑도는 등 경제 전반에 어려움이 가중됐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경제기획원은 결국 62년말 1차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전면 수정작업에 착수한다. 1년여에 걸친 수정작업을 거쳐 64년2월 64~66년을 대상으로 하는 3개년 수정계획이 윤곽을 드러냈다. 연 평균 경제성장율 목표는 당초 7.1%에서 5%로 대폭 축소됐다. 또 외자도입 규모도 당초 목표에 비해 크게 축소 조정됐다. 무엇보다도 수정전 계획이 다분히 자주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던데 반해 수정후 계획은 미국과의 관계를 의식해 대외지향적이고 개방적인 내용으로 보완됐다는게 큰 차이였다. 미국 정부는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 과정에서 ‘국가 지도(指導)’를 내세우며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부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자칫 사회주의식 경제개발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이 같은 시각차 속에 한미간의 불편한 관계는 2년여간 지속됐고, 결국 64년 수정계획안이 나오고서야 양국간 마찰은 해소됐다. ◇ “우리도 할 수 있다”…국민적 자신감 고양 시행 첫해의 실적과는 달리 66년 마감된 제1차 5개년계획의 종합성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62년부터 66년까지 5년간 연 평균 경제성장율은 8.5%를 기록해 수정 전 목표치 7.1%를 크게 넘어섰다. 또 1인당 국민총생산은 같은 기간 83달러에서 125달러로 늘어나 연 평균 5.6%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 같은 결과는 국민들에게 한국경제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 넣었으며, “우리도 할 수 있다”(Can-Doism)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경제개발계획은 이후 81년까지 4차에 걸쳐 진행되면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끄는 기폭제 역할을 담당한다. 82년 제5차 계획부터는 명칭이 ‘경제사회발전계획’으로 바뀌었으며, 96년 제7차 5개년계획을 끝으로 35년간의 경제개발 대장정을 마무리 짓는다. 경제개발계획이 60년대 최고 지도자였던 박정희에 의해 주도됐는 지, 아니면 박정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시 미국의 외교전략에 의해 조성된 역사적 필연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하지만 경제개발계획이 50년대 폐허상황을 극복하고 ‘도약(Take-Off)’을 통한 산업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경제개발을 위한 최고 통치권자의 의지와 기업들의 협조,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국제외교의 3각 시너지 속에 한국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거대한 역사가 탄생했던 것이다. ("한국경제 반세기"는 매주 화, 목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