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 여긴 어디? 무엇부터 리부팅할 건가

by오현주 기자
2016.01.20 06:17:05

최후의 지구 생존자 위한 지침서
물·식량비축 전기·통신기기 작동
의학·문자·시간 재건법도 전달
45억년 지탱한 문명 뼈대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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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루이스 다트넬|424쪽|김영사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계는 끝났다.” 상상하기조차 귀찮을 수 있다.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쯤 생각해야 한다. 왜냐고? 세상은 언제든 망해버릴 수 있으니까. 위태위태하던 핵탄두가 어디선가 터질 수도 있고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할 수도 있으니.

그동안 수많은 SF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해 지구멸망에 대해 ‘입문’을 했다면 이제는 ‘심화’ 과정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폐허를 헤매며 두리번거리다 끝나고 마는 것이 ‘입문’이라면, ‘심화’는 깡그리 사라진 문명을 재건하는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과연 그 일을 어떻게 해낼 건가. 게다가 완전히 ‘나 홀로 지구에서’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한단 말인가.

전부 안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수룩한 현대인의 황망한 능력은 이미 다 드러나 있다. 최첨단 문명을 다룬다고는 하는데 정작 의식주는 물론이고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선 ‘깜깜이‘다. 60여년 전인 1958년 레너드 리드가 쓴 ‘나는 연필입니다’가 진한 포석을 깔았었다. ‘연필’이란 지극히 단순한 도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내용인데. 원료와 생산수단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능력과 자원을 동시에 보유한 사람 역시 없더란 결론이다. 물론 ‘왈가왈부’ 말들은 많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우주국의 연구원이 나섰다. 우주생물학 전공을 최대한 살려 이른바 ‘인류 최후 생존자를 위한 리부팅 안내서’를 내놓은 거다. 대재앙을 맞아 인류 가운데 1만여명이 살아남았다는 가상 상황을 설정하고 그들을 생존케 하는 절대지침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곤 우리가 진짜 궁금한 것들, 가령 당장 무엇부터 시작할지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 사라진 문명이 남긴 쓰레기더미서 재사용하기 위해 끄집어낼 필수품 등에 대해 세심하게 이른다. 하지만 그가 종국에 전하려는 건 문명을 다시 건설하는 방법이다. 식량과 옷과 집을 해결한 뒤 전염병 등에 대처하기 위한 최소한의 의약품 고안은 기본. 여기에 세상을 다시 움직일 동력과 전력 등 에너지, 나아가 문자와 시간, 통신기기까지는 만들어줘야 ‘문명을 입에 올렸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거대한 ‘연필 만들기’. 책은 그 집약본이다.

▲영화 아니다 현실이다

식물학자이자 기계공학자인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의 화성 생존기. 책의 면면이 영화 ‘마션’의 장면과 오버랩될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 더 척박한지는 닥쳐봐야 알겠지만. 화성과는 다른 지구에서 최악의 종말을 보고야 말았을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거다. 생존자가 곧바로 자급자족해야 하는 건 아니란 것. 영국 환경식품농무부에 따르면 쌀과 말린 국수, 통조림처럼 부패하지 않는 비냉동식품이 영국 전역에 11.8일치가 비축돼 있단다. 만약 1만명 정도가 살아남는다면 50년은 견딜 수 있을 분량이다.

그래도 지금부턴 최소한의 생존 시나리오가 필요한데. 저자가 누누이 강조한 건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할 때 인간의 빛났던 과학기술 발전과정을 그대로 답습할 까닭은 없다는 거다. ‘문명 2.0’이란 건 화석에너지의 산업혁명부터 인터넷 기반의 정보혁명이 전개되는 단계와는 별개란 얘기다. 각각 다른 시대에 속한 테크놀로지가 뒤죽박죽된, 앞뒤가 맞지 않는 쪽모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 ‘녹색’은 챙겨야 한단다. 신중하게 자산을 재활용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려면 말이다. 예컨대 기본지식과 요령만 있으면 자연에서 소다, 석회, 암모니아, 산, 알코올 등을 바로 추출해 종말 이후의 화학산업을 신속하게 재개할 수 있다고 했다.



▲세상서 가장 현실적인 ‘지식’

깨끗한 음용수는 지금도 그렇지만 종말 이후에도 필수품이다. 도시급수장이 말라버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물을 확보하란다. 덮개를 덮고 빛을 차단하는 건 필수. 정수가 필요하다면 가정용 빨래 표백제를 찾으면 된다. 몇방울이면 1시간 내에 1ℓ를 살균할 수 있단다.

식량이 필요하다면 흰 밀가루를 확보하면 될 듯하다. 수년 동안 보관이 가능하다. 물론 막강한 보존식품은 통조림이다. 유통기한 따윈 무시해도 좋다. 문명이 붕괴한 이후로도 수십년은 거뜬하단다. 초강력 접착제는 상처를 신속하게 봉합하는 데 쓸 수 있다. 베트남전쟁 때 미군이 사용했던 ‘응급밴드’다. 몇몇 의약품을 확보할 수 있다면 약효를 걱정하는 따위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100여종의 의약품 중 90%는 유효기간을 훨씬 넘긴단다.

전기는 당장 태양전지판을 이용할 수 있다. 디젤발전기나 풍력터빈과 달리 움직이는 부품이 없어 정기적으로 보수하지 않아도 되는 강점을 가졌다. 자동차용 교류발전기도 쓸 만하다. 축이 회전하면 12볼트의 직류가 안정적으로 생산된다니 소규모 발전기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또 장거리 통신망이 다 끊어진 폐허 위에서 생존자가 가장 먼저 찾아내야 할 통신기기는 구식 워키토기. 모바일·인터넷시절은 빨리 잊는 것이 좋겠다.

▲문명을 지탱하는 필수적 요소는?

종말을 봐야 안다. 사라지기 전에 챙겨둬야 할 가장 중요한 자원은 지식이란 것을. 지난 45억년간 지구와 인류가 이룬 핵심지식과 기술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일의 중요성은 쓰레기더미를 헤맬수록 간절해진다.

그 때문인가. 저자가 마지막으로 처리한 가장 중요한 일은 이 거대한 ‘연필 만들기’에 제목을 단 일이 아닐까 싶다. 고민하고 고민했을 타이틀이 원서명 그대로 ‘지식’(The Knowledge)이다. 저자의 지식은 최후의 상황에도 도움을 주지만 인류가 탄생한 이래 문명을 지탱하고 축적해온 지식의 뼈대를 한눈에 파악하는 역할도 기꺼이 맡는다. 말 그대로 인간의 지식발전과정이다. 무릎을 치게 할 화룡점정이 아니겠나. 세상에 이보다 더 극적이고 체계적이며 피가 되고 살이 될 지식은 다신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