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철의 트렌드 읽기]갓 지은 밥, 맛있는 패션
by편집부 기자
2013.10.17 07:59:20
가을은 햅쌀로 만든 밥을 먹을 수 있는 계절이다. 맛집을 즐겨찾는 필자는 계절음식에도 관심이 많다. 시월에는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전어, 고등어가 맛있어 지고 굴과 홍합도 제철이다. 보관 기술이 진보해서 냉동된 재료로 사시사철 거의 모든 재료를 구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제철에 나는 음식이 제맛이다. 물론 김치와 젓갈처럼 오랫동안 보관하며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식탁의 메인, 쌀로 지은 밥 만큼은 다르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취향과 환경이 다를 수 있지만 거의 매일 새로 지어 먹는다.
필자가 상품기획 업무를 막 배우던 신입사원 시절, 개발한 상품 판매가 부진하고 적시성이 떨어질 때 직장 상사는 ‘식욕이 반찬이다’이란 말을 늘 해왔다. 밥 먹을 때가 아니어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상황을 빗대어 꺼낸 말이다. 고객이 필요한 때에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는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던 시절, 즉 공급이 수요보다 부족해서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과거와 지금은 분명 다른 환경이다. 너무 많은 물건이 넘쳐 나는 공급과잉의 시대를 살면서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기업들이 고객에게 ‘식욕’을 자극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소비를 촉발하기 위해 광고와 판촉 기법이 날로 진보해 가지만 갈수록 똑똑해져 가는 소비자를 붙잡기엔 역부족이다.
대량 급식을 위해 쪄낸 일명 ‘짬밥’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 있었다. 짬밥과 어머니가 막 지어 주신 밥의 맛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게 최고로 인정받는 밥은 쌀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가마솥에 막 지어낸 것일 게다. 밥맛이 좋다고 소문난 식당 대부분도 고객이 주문할 때 작은 크기의 가마솥으로 밥을 짓기 시작한다.
올 상반기 미주 지역의 바이어와 필자가 담당하고 있는 패션 브랜드의 수출 상담을 하면서 전통적인 상품기획과 수주의 사이클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았다. 판매시점을 기준으로 10개월 전에 바이어의 오더(주문)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지금은 바이어들이 상품 구성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 판매 시점 3개월 전까지 구매 예산의 50%를 쥐고 있다고 한다. 보수적인 미주 시장, 특히 백화점에서 변화의 경향이 나타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미주시장의 변화에 선행되어 제조·유통 일괄형 의류(SPA)는 지난 십여년 동안 백화점 등 전통적인 유통 채널을 위협하며 성장해왔다. SPA는 최신 트렌드를 다양하게 선보이는 다품종 다량 생산 형태로 소비자 취향을 잘 반영해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으로도 불린다. 지난 몇 년간 국내서도 SPA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그러한 과정 중에 국내 대형 백화점에서는 원부자재와 봉제까지 계열화된 동대문 지역 생산 기반을 활용해 성장한 독립형 디자이너들에 주목하고 있다. 일부 여성복 브랜드들 역시 기존 생산 라인을 벗어나 판매 시점에 근접한 기획이 가능한 도매업체들과의 협력을 시도하고 있다. 이 같은 국내 패션 시장의 변화에 대해 미주지역의 바이어는 ‘Immediate’(즉각 또는 즉시)이라는 용어로 이해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판매시점 한달 전, 즉 소비자 선호경향에 대한 윤곽이 거의 명확해지는 시점에 기획이 시작되는 국내 패션시장에 대해 놀라워 했다. 또 그러한 상품 기획 일정에 대응하는 원부자재 시장과 봉제 공장의 움직임에도 놀란 눈치였다.
앞으로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소비자의 입맛을 붙잡기 위해서는 다품종 다량 생산의 ‘패스트 패션’을 넘어 다품종 소량 생산과 판매 시점에 초근접된 상품을 개발하는 ‘즉시 패션’(Immediate Fashion) 방식이 더 많이 요구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따뜻한 밥을 먹고 싶어하는 한 사람을 위해 가마솥에 ‘갓 지은 밥’이 가장 맛있는 밥인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