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사진은 새 삶의 출발점"…20대 영정사진 찍는 24살 사진작가

by이슬기 기자
2018.05.28 06:30:00

[글·사진 =이데일리 이슬기 기자] “내가 내일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늘을 정말 후회 없이 살 것 같지 않아요?”

2030 청년들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사진작가 홍산(24)씨. 그는 젊은 사람들을 상대로 왜 하필 영정 사진을 찍어주고 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반문했다.

홍씨는 “내가 찍는 영정사진은 ‘내 안의 나’를 마주하는 계기로써 일상의 권태를 깨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며 “내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모습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면 내일을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홍씨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사진작가 홍산(24)씨(사진=사진작가 홍산 제공)

스물네살. 죽음을 얘기하는 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나이의 홍씨가 ‘영정사진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지난 4월이다. 지난해 같은 학과 후배가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일이 계기가 됐다.

홍씨는 “학과 건물엔 아직도 그 친구를 추모하기 위해 같이 찍은 사진들이 붙어 있다. 곁을 지나다 ‘이 친구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젊은 사람들이 죽으면 영정사진을 준비한 게 없어서 가지고 있는 사진가운데 잘 나온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쓴다. 죽기 전에 내 마지막 모습을 스스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길 모습을 촬영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생의 마지막 날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있는 지 떠올린다. 죽음을 증명하는 영정사진에 투영한 내 모습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내일의 삶을 끌어갈 힘을 얻는다. 홍씨를 찾는 이들 대부분이 20~30대인 이유다.

15일 오후 임지윤(23)씨가 사진작가 홍산씨와 영정사진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임지윤(23)씨가 이날 촬영한 사진(사진=사진작가 홍산 제공)

이날 작업실에 찾아온 임지윤(23)씨도 “삶의 에너지를 불어넣고 싶어서 촬영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임씨는 “하루하루 지나가는 게 아까운데 더 치열하게 살려면 한 번쯤 죽음을 경험해보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며 “죽음도 인생의 일부인데 너무 심각하게 대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덤덤히 말했다.

의뢰인에게 건네지는 유서란에 임씨는 ‘잘 살다 갑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라고 짧게 남긴 뒤 촬영에 임했다. 의뢰인에 따라서는 A4용지 한 페이지를 다 채울 정도로 길게 유서를 남기는 이도 있다고 한다. 임씨는 “평소 웃어야만 하는 일들이 많았다”며 “이번만큼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임씨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귀걸이 사업에 대한 얘기를 홍씨에게 하면서 발랄한 분위기 속에서 영정사진 촬영을 마쳤다. 촬영은 사람에 따라 30분에서 1시간정도 걸리지만 이날 촬영은 임씨가 유서를 미리 생각해 온 탓에 30분 만에 끝났다.

의뢰인들이 홍산 작가와의 사진촬영에 앞서 작성하는 유서란. 한 20대 초반 여성은 “무욕의 삶을 살고 있어서 죽음에 대해 담백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유서를 쓰면서 더 치열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홍씨를 찾아오는 의뢰인은 각양각색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죽음을 생각해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평소 죽음을 끈질기게 고민하는 이도 있다. 20대의 한 남성은 무표정으로 영정사진을 찍은 뒤 유서에 “평생 열등감으로 살아왔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홍씨는 “영정사진을 작업할 때 의뢰인에게 무례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며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분들에게 불쾌한 기억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홍씨는 영정사진 프로젝트를 연말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 5월 영정사진 예약은 모두 마감된 상태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전시회 개최도 생각 중이다.

홍씨는 “외국어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등 대한민국 표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며 “영정사진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다”고 전했다.

영정사진 프로젝트가 끝나도 홍씨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지속할 계획이다. 홍씨는 “이번 프로젝트도 그렇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싶다”며 “특히 사회적 약자를 따뜻하게 보듬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