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남북관계] '남북정상 합의 백지화' 北의 노림수는?

by김미경 기자
2020.06.10 06:00:00

벼랑 끝 내몰리는 남북관계
북, 靑 핫라인·軍 통신선 모두 차단
남한은 적, 단절 시작…대결 시대로 후퇴하나
단 고비마다 채널 차단-복원 반복
대북특사 파견 등 대화 접점 이어가야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남북간 ‘대화의 문’이 닫혔다. 북한이 9일 청와대 핫라인(Hot Line·직통전화)을 포함한 모든 통신채널을 단절하면서 남북 관계는 중대 기로에 놓였다. 북측이 우리 정부를 ‘적’으로 규정하고 단계별 적대 수위를 높여갈 것을 예고한 만큼, 군사도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자칫 남북 관계가 ‘단절 상태’로 역행하는 것을 넘어 2018년 판문점 선언 이전의 ‘대결 구도’로 회귀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북한이 남북 간 모든 통신채널의 완전 차단을 공언한 이날 낮 12시 끝내 우리 측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오전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개시 통화에 이어 정오에 통화 연결을 시도했으나, 북측이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북한이 남북 간 모든 통신연락 채널을 완전히 폐기한다고 밝힌 9일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에서 바라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로 향하는 길이 적막하다(사진=연합뉴스).
북한의 통신연락선 차단 조치는 지난 4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대북전단(삐라) 살포 문제를 들어 △연락사무소 폐기 △개성공단 완전 철거 △9·19군사합의 파기 가능성을 언급한지 닷새 만에 나온 것이다

통일부는 원론적인 입장을 내놨다. 이 당국자는 “남북 간 통신선은 소통을 위한 기본 수단이므로 남북 합의에 따라 유지돼야 한다”면서 “합의 준수 차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겠다”고 했다. 북한이 ‘대남사업의 방향을 적대시 전략’으로 전환하겠다고 한 데 대해선 별다른 입장 표명 없이 “상황을 지켜보겠다”고만 말했다.

앞서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과 김영철 당 부위원장이 대남사업부서 사업총화 회의에서 남북 간 모든 통신 연락선을 완전히 차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대남사업을 철저히 대적(對敵)사업으로 전환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한 단계적 대적사업 계획들을 심의했다”고 알렸다.

실제로 연락사무소와 동·서해지구 군 통신선 및 함정 간 국제상선공통망(핫라인)이 이날 오전부터 북한의 무응답으로 먹통이 됐다. 이는 북한이 언급한 ‘단계별 대적사업계획’의 ‘첫 조치’로, 추가 행동이 예고된다.

북한이 남북 간 모든 통신채널 차단에 나선 것은 남북관계의 ‘질적 전환’을 의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과거에도 남북 경색국면 조성의 첫 단계가 연락기능의 차단이었다”며 “대북전단을 빌미로 남북관계를 당분간 냉각기로 가져가겠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미중갈등 국면과 코로나19로 인한 경제난 등을 감안해 진전 없는 남북관계의 긴장 조성을 통해 후일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얘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동생인 ‘대남총괄’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사진=연합뉴스).
북한의 파상공세를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관련 사항을 주민들이 다 볼 수 있는 노동신문에 실었다는 점에서 단기간 내 방침을 바꿀 여지는 희박해 보인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의 전형적인 벼랑 끝 전술이 재연되고 있다”며 “대남사업을 대적시 전략으로 전환한다는 결정은 최악의 경우 군사적 대결 상황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대진 아주대 교수는 “개성공단 완전철수를 위한 자산 몰수도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일각에선 통신 단절 사례가 과거에도 있었던 만큼, 좀더 추이를 봐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이번 건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총 6건의 남북 간 직통선 단절 사례가 있었다. 통일부는 “전통문이나 방송, 주로 성명을 통해 미리 알리거나 아무런 조치 없이 일방적으로 중단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도 “(남북관계에) 겨울이 너무 빨리 왔다”면서도 일단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 부의장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또 슬그머니 연결이 된다”며 “북측의 통신선 차단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픽=이데일리 이동훈 기자.
전문가들은 대북특사 파견 등을 통해 남북 간 대화의 접점을 이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한 정부의 대화 채널 확보 노력이 시급하다는 평가다.

정 수석부의장은 “(북한 메시지의) 핵심은 2018년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선언, 군사분야합의를 우리가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 쌓여 삐라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라며 “(이제라도 정부는) 삐라를 법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해나가고, 경찰이나 군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이 정말 파국을 고려했다면 모든 대화 채널을 끊은 후 통보했을 것”이라며 “예고적 행위를 한 것은 최소한의 여지는 남겨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위급 특사는 물론 중국 외교 채널 등을 동원해 북한과의 대화 채널을 확보해 상황 악화를 막아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