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달러결제 제한 안 풀렸는데…교두보 선점에 '스냅백' 폭탄 외면

by정다슬 기자
2018.06.04 06:05:00

''제2의 중동의 봄'' 신기루 되나
대림 2조원대 이란 공사 끝내 무산
외국 금융기관과 협력 추진했지만 美 대이란 제재 복원으로 불발
현대·SK건설도 이란서 공사 수주
"금융조달 불가능할 땐 계약 해지…아직 초기 단계 지켜볼 것"

[그래픽=이데일리 이동훈 기자]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건설업계는 대림산업이 이란의 정유회사와 맺은 2조원대 공사 계약 무산에 대해 사실상 예견됐던 일이라는 평가다. 미국과 이란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제재도 남아 있었던 설익은 상황에서 지나치게 일찍 축포를 터뜨렸다는 것이다. 대림산업뿐만 아니라 이란에서 수주를 한 현대엔지니어링·현대건설, SK건설 역시 실질적인 사업 성과로 이어지기에는 난관이 작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3일 금융권과 건설업계에 따르면 대림산업은 지난 3월 이란 이스파한 정유공장 개선사업을 수주하면서 수출입은행과 이란 측이 기본여신협정(FA)를 체결한 뒤 10개월 내에 금융조달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담았다.

총 사업비가 20억달러(2조 3000억원)에 달하는 이스파한 정유공장 개선사업은 대림산업이 설계부터 기자재 구매, 시공, 자금 조달까지 모든 과정을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시공자금융 주선사업이다. 대림산업은 공적수출신용기관(ECA)인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의 지원을 받아 사업비의 85% 정도를 조달할 예정이었다.

수은이 지난해 8월 이란중앙은행과 94억달러(10조 6465억원) 규모의 여신을 제공하는 기본여신협정(FA)을 체결했지만 실질적으로 자금 조달을 하지 못했다. 자금조달이 이뤄지지 않자 이스파한 정유회사는 자신들이 2000만달러를 지원해 설계작업을 하자고도 했다. 계약서에 따르면 기간 내 자금조달을 하지 못할 경우 협의를 통해 3개월 자금조달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그러나 대림산업은 미국의 이란 제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수은 관계자는 “이스파한 정유사업의 경우 워낙 공사규모가 크기 때문에 수은이 단독으로 지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나라의 금융기관과 함께 하는 신디케이트론(syndicate loan)으로 진행돼야 한다”며 “미국 제재복원 등으로 협조융자기관들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앞서 GS건설은 2009년 이란에서 총 2조 6000억원 규모의 플랜트 건설공사 프로젝트 2건을 수주했으나 미국이 2010년 ‘포괄적 이란 제재법’을 발효하면서 수주가 무산된 바 있다. 당시 계약이 지속되기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금융조달이었다. GS건설은 일본 기업과 함께 사업을 수주하고 각각 금융 조달 부담을 나누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이 발을 빼면서 금융 조달이 막혔던 것이다.



2016년 9월 우리나라 모 중견조선사가 이란의 국영조선소와 270억원 규모 계약을 체결했으나 자금조달 방안이 마련되지 못해 사업이 지연된 사례도 있었다.

지난 2015년 7월 서방국과 이란 간 핵협상 타결 후에도 스냅백(Snap back·제재 복원) 위험성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었다. 미국이 이란에 대한 제재를 풀겠다고 했지만 가장 핵심인 달러화 결제에 대한 제재는 여전히 막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기업들은 이란과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은행과 우리은행에 개설된 이란 중앙은행 명의의 원화를 입출금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선수금을 받는 것이 까다로울 뿐더러 수령시기가 늦어진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여기에 스냅백이 발효되면 180일 이내 대금 결제나 채권 회수 등 제반조치를 완료해야 한다. 유가 하락 등으로 이란 발주처의 대금 지불 능력이 불안하고 금융결제망조차 불안한 상황에서 금융 조달에 참가할 금융기관을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KDB산업은행은 “미국의 금융제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한국기업은 단기적으로 수익성보다는 이란시장에서의 교두보 확보를 위해 자금조달 부담이 적은 소규모 사업에 대한 진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대림산업의 계약 해지가 이란에서 사업을 수주한 다른 건설사에도 영향을 줄지 주목된다. 대림산업 외에도 현대엔지니어링이 지난해 3월 현대건설과 함께 30억 9800만유로(3조 8000억원) 규모의 ‘사우스파12구역’ 가스전 확장 공사를 수주했고 SK건설은 지난해 8월 타브리즈 정유공장 현대화 사업에 대한 기본 계약을 16억달러(1조 7000억원)에 따냈다.

건설사들은 사업이 초기 단계라 계약 이행에 따른 금전적인 부담이 없는 만큼 향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현대엔지니어링 관계자는 “금융조달 기한은 설정하지 않았고 금융조달이 완료되면 착공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으로 계약했다”면서도 “미국의 제재가 워낙 강력해 대외여건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발주사와 논의해 금융조달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나 현재는 그럴만한 상황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SK건설 관계자는 “현재 체결한 계약은 초기 단계인 기본계약으로 금융 조달 등을 논의할 상황도 아니다”라며 “공시계약 체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기 때문에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