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정부서 바뀔텐데", "국회서 뒤집힐텐데"…의욕상실 공직사회

by이진철 기자
2020.11.19 05:00:00

"접시를 깨더라도” 적극행정 독려에도 소극행정 신고 월 3천건
특별법 제정해 가덕도 신공항 대못 박는 국회..정책 실종
정치가 행정 간섭·통제 없애야 적극행정 가능”

정세균 국무총리가 상반기 총리실 적극행정 우수직원에게 수여한 ‘적극행정 접시’. 총리실 제공
[이데일리 이진철 신하영 김상윤 기자] “위에서는 적극행정을 하라고 독려하지만 주요 정책은 당·청이 주도하고 어렵게 만든 정책을 걸핏하면 국회에서 뒤집는데 의욕을 갖고 일하기 쉽지 않다.”(정부부처 A국장)

문재인 정부는 공직사회 개혁과 정책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적극행정을 장려해 왔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일하다 접시를 깨는 것은 괜찮지만 일하지 않아 접시에 먼지가 쌓여서는 안된다”며 접시론을 앞세워 공무원들을 독려했다. 실제로 코로나19 대응과정에서 신속한 진단키트 승인과 드라이브 스루 진료 등 일부 적극행정 제도의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인 의석수를 확보한 21대 국회 들어 정부가 추진한 정책을 여당이 뒤집는 사례가 빈번해지자 공직사회에 무기력증이 확산하는 모습이다.

공무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소극행정신고가 월평균 3000여건에 달하는 등 행정서비스에 국민들의 불만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한정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소극행정 신고센터 운영현황’에 따르면 소극행정 신고센터가 개설된 지난해 3월부터 올해 8월말까지 5만5033건이 신고 접수됐다. ‘소극행정 신고 민원 만족도 조사’에 따르면 ‘매우만족’이라도 답한 건수는 1657건으로 전체 응답(1만9857건) 중 8.3%에 불과했다.

축산관련단체협의회(축단협)는 코로나19에 따른 경마 중단으로 고사상태에 빠진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온라인 경마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마사회는 2~6월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경마를 중단하면서 입은 손실금액이 4조6000억원에 달할 정도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온라인으로 산업구조가 변화하고 있는 것과도 부합한다는 게 축단협 측 주장이다. 하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사행산업을 키운다는 비판여론을 우려해 요지부동이다.

한국마사회는 작년 국세(3983억원)와 지방세(1조597억원) 등 1조5000억원에 가까운 세금을 냈는데 올해는 약 1조원 감소할 전망이다.

축단협은 지난 2월부터 일반 관객이 참여하는 경마가 중단돼 승마장을 포함해 말 생산자·유통업자, 식당, 경마 정보 사업자 등 2700여개 연관 업체들과 35만명 이상의 직·간접 종사자들이 폐업과 파산에 직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주요 정책이 청와대나 여당이 주도하면서 매듭지어진 경우도 많다. 교육부 관련 정책 중 △유치원 공공성 강화 △고교무상교육 △정시 수능전형 확대 정책 등은 당정협의회나 청와대 주도로 결정됐다.



유치원 공공성 강화방안은 정부 재정이 투입되는 일부 사립유치원 회계 비리로 2018년 10월 추진이 확정됐다. 고교무상교육은 재원분담 문제로 진통을 겪다 지난해 10월 확정됐으며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겨 2021년 전면 시행을 결정했다. 학생부종합전형 비중이 큰 주요 대학의 정시 수능전형 확대 결정은 청와대가 주도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정시 확대를 언급하면서 구체화됐다. 교육부 B국장은 “현 정부 들어 고교무상교육이나 정시 확대 등에서 청와대나 여당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교육 공무원들의 입지가 좁아졌다”이라고 토로했다.

가덕도 신공항은 아예 국회가 입법권을 동원해 추진하기로 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지난 17일 무총리실 산하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가 “김해 신공항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히자 대책회의를 갖고 가덕도 신공항 추진 절차 간소화를 위한 특별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당내에 한정애 정책위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동남권 신공항 추진단’도 설치했다. 특별법은 신공항을 조속히 추진하고 부지는 아예 가덕도로 못 박는 게 골자다. 앞서 전재수 의원 등 PK(부산·경남) 의원들이 이른바 ‘신공항 패스트트랙법’ 사전 작업을 마쳐둔 상태여서 특별법은 이달 내 발의될 전망이다.



공직사회에서는 이른바 ‘감사 포비아(공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감사원이 월성1호기 관련 자료를 삭제를 지시하고 이를 실행한 산업통상자원부 국장과 과장에 대해서는 징계를 요구한 것과 관련, 정부부처의 한 공무원은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월성1호기 셧다운 결정에 관여했는데 징계까지 받으니 앞으로 누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겠냐”고 토로했다.

지난 5일 전격적으로 이뤄진 검찰 압수수색은 산업부 직원들에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산업부 한 관계자는 “검찰이 압수수색까지 할 줄은 몰랐다”며 “지켜보던 직원들이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지어 검찰 수사까지 받아야 하냐고 한탄을 했다”고 전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8일 감사원 감사에 대해 재심의를 청구했다. 산업부는 “국정과제 취지 등을 고려해 폐쇄 시기를 정책적으로 판단했고, 정책 결정 사항을 한수원에 전달할 때도 행정지도의 원칙을 준수했다”고 항변했다.

정치권 압박에 무리수를 뒀다가 뒤탈이 나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정치권의 압박에 고용노동부는 긴급 고용안정지원금 2주 이내 지급 방침 세웠으나 서류 확인작업 늦어져 실제 지원금 지급은 3개월 넘게 늦어졌다. 당초 4차 추경안이 통과하면 8월 말까지 지급하겠다는 계획은 9월 초까지, 추석전까지 등 지급 시한을 계속 늦춰 긴급 고용안정지원금이 ‘긴급’ 아니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신청과 지급이 뒤죽박죽 이루어지다보니 신청자들 민원도 폭주했다.

한국사회과학협의회는 최근 ‘적극행정을 위한 법체계와 감사원의 역할에 관한 연구’ 용역보고서에서 “정치가 행정을 주도하는 현실에서 아무리 적극행정을 강조하고 제도를 개선해도 ‘다음 정부에서 어떻게 뒤바뀌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신의 상태에서는 적극행정을 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용철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치가 지나치게 행정에 간섭하거나 통제하려는 현상을 없애야만 적극행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결국 대통령이나 장관의 뜻에 따라 움직였을 텐데 의사결정권자들은 책임지지 않고 있다”면서 ”적극행정에 대한 공무원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11월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필수노동자 보호 및 지원대책 당정청 협의’에서 참석자들의 회의를 하고 있다. 기재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