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이진철 기자
2019.04.18 06:00:00
[이데일리 이진철 기자] 인기 해외 여행지 중의 한 곳인 중국 하이난성의 싼야시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인 외곽마을에는 ‘천인갱’이라는 한국인을 위한 자그마한 추모관이 있다.
지난달 27일 방문한 ‘천인갱’은 유골을 발굴하다 중단한 흔적과 함께 근처 축사에서 흘러나온 오물로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천인갱 추모관을 둘러싼 담장 곳곳은 허물어졌고 그 옆에는 현지 주민이 정부 단속을 피해 묘를 쓰기 위해 몰래 놓아둔 관들이 쌓여 있었다. 이날 천인갱을 참배한 정운현 국무총리비서실장은 “막상 현장을 직접 보니 후손으로서 죄스럽고 부끄럽다”고 했다.
중국에서 한인들의 일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강정애 박사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때 하이난섬을 침략한 일본은 1943년부터 조선인 2000여명을 ‘조선 보국대’라는 이름아래 철광산 노무자로 보냈다. 조선인 징용자들은 경성형무소 등의 수용자들로 구성됐다. 이들 중에는 일제에 맞서다 잡힌 사상범도 상당수 포함됐을 것이란 게 연구자들의 추정이다.
하이난 징용 조선인들은 1945년 8월 일제 패망과 함께 광복을 맞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군의 학대와 굶주림,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이들의 시신은 구덩이 속에 집단 매장됐다. 천인갱이란 이름에는 조선인 1300명이 집단 매장돼 붙여진 참혹한 역사가 녹아있다.
천인갱은 지난 1995년 중국 하이난성 정부에서 엮은 일제 피해자 구술집을 통해 처음 존재가 드러난 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한 민간기업이 추모관을 짓고 부지를 관리하고 있다.
하이난에서 망고농장을 운영하던 이 중소기업은 ‘천인갱’의 사연을 듣고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토지 임대계약을 맺고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유골을 발굴한 뒤 추모관을 세웠다. 당시만 지역주민들의 반응도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들어 부동산 개발바람이 하이난까지 불어오면서 천인갱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관리에 애를 먹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재단법인 ‘천인갱’의 한 관계자는 “일본기업이 거액의 마을발전 기금을 기부한 후부터 주민들이 일본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애국 선현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를 국내로 송환하는데 적극 나서고 있다. 이낙연 총리는 지난 9일 국외 안장 독립유공자 유해 봉영사에서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오늘까지 고국에 모셔온 애국선열 유해는 139위”라며 “모시고 와야 할 분들은 아직도 많다. 정부가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하이난섬에서 절명한 선조들의 유해는 실태 조사는 커녕 20년이 넘게 정부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다. 나라를 빼앗긴 죄로 이국에 끌려와 죽고 잊혀진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될 일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가 이제라도 ‘천인갱’을 방문하고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애국지사는 물론 이름없이 죽어간 일제 강제징용자들의 원혼도 우리가 보듬어야 할, 잊어서는 안될 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