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의 추억 "비틀로 세상 바꾼 적도 있는데…"

by오현주 기자
2016.01.13 06:17:07

딱정벌레차, 화려·현란 미국차 틈새서
젊은층 저항의 아이콘으로
''휘청'' 폭스바겐 현재와 오버랩
100년 인기끈 자동차 15대 통해
현대문명 변화상 거꾸로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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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의 시대
폴 인그래시아|512쪽|사이언스북스

일명 딱정벌레차로 불리는 폭스바겐 ‘비틀’. 미국 디트로이트 화려·현란을 거역하는 대항문화의 표상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10여년간 미국 수입차 중 가장 많이 팔렸다.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어디로 봐도 딱정벌레다. 1930년대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스포츠카 엔지니어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개발한 자동차. 본격적인 생산은 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였다. 그해에 1785대, 이듬해에 1만여대를 생산했다. 1936년 개발한 시험모델의 사양은 수평 대향 4기통에 1.1ℓ 엔진. 최고속도는 98km/h, 최대출력 26.5마력. 지금 보면 딱 장난감 수준이지만 그래 봬도 단일모델로는 세계서 가장 많이 생산한 차다. 25년간 엔진형태와 원형을 유지하며, 단종 때까지 2100만대 이상이 세상에 나왔다.

독일 폭스바겐의 ‘비틀’ 얘기다. 비틀이란 이름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붙었다. 이름이 귀엽다고 좋아했단다. 그런데 귀여운 이름이라고 해서 바로 ‘웰컴’한 것은 아니다. 1950년대 후반까진 미국의 적으로 간주한, 독일의 ‘국민차’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거대한 미국차와는 뭔가 다른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당장은 아담한 실용성. 먼저 알아본 건 히피들이다. 특히 같이 들여온 식빵 모양의 마이크로버스는 대항문화의 표상이 됐다. 미국 자동차생산의 메카였던 디트로이트가 내세운 화려함와 현란함을 거역한 것처럼 보인 거다.

그것이 먹혔다. 1950년대 전반 5년간 미국서 가장 많이 팔린 수입차 르노를 제치고 1959년 15만대를 팔아치운 뒤 1960년대 말 광고·판매서 정점을 찍었다. 배우 폴 뉴먼은 1953년 첫차로 비틀을 구입해 결국 5대를 보유했고 존 레넌의 차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디트로이트에 미친 영향이 컸다. 하나둘 소형차 제작에 뛰어들더니, 제너럴모터스가 1959년 내놓은 쉐보레 콜베어는 비틀과 똑같은 공랭식 엔진을 후방에 장착하기에 이른다. ‘잘난 척’도 사라질 수밖에. 콜베어를 낼 당시 쉐보레 총괄경영자는 “폭스바겐은 이 나라에서 2년 안에 사업을 접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결과는 비틀의 연승이었다.

▲자동차엔진은 기억한다, 시대의 영욕을

비틀의 영광을 장황하게 짚어본 건 폭스바겐의 현재와 오버랩 된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세계를 뒤흔든 폭스바겐의 디젤차 배출가스 조작사태는 여전히 파장을 넓히고 있다. 대량리콜의 경제적 타격은 물론 다양한 법적 공방으로 폭스바겐의 회생 여부까지 의심되는 상황. 불꽃은 환경규제로까지 옮겨붙어 논란을 증폭하고 있다.

그렇다고 비틀의 영예까지 증발하겠나. 자동차는 문화고 문명이며 역사인 것을. 당대 자동차는 당대 문명의 바로미터였다. 책이 풀어놓은 자동차엔진 이야기는 바로 이 관점을 꿰뚫는다. 25년 동안 자동차산업을 취재해온 저널리스트는 지난 100년 동안 인류를 진하게 유혹한 15대의 차를 굴리면서 현대문명의 변화상을 유려하게 짚는다.

저자가 꼽은 15대는 포드 모델 T, 라살 모델 303, 쉐보레 콜벳, 캐딜락 엘도라도, 폭스바겐 비틀,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 쉐보레 콜베어, 포드 머스탱, 폰티액 GTO, 혼다 어코드, 크라이슬러 미니밴, BMW 3 시리즈, 지프, 포드 F-시리즈, 도요타 프리우스. 미국인이 미국거리를 오가는 차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선정 역시 다분히 미국적이긴 하다.



▲‘포드 모델 T’ ‘도요타 프리우스’가 태운 ‘내일’

그럼에도 책이 짚은 자동차문명사를 잘 들어다볼 필요는 있다. 출발선상엔 포드 모델 T를 세웠다. 미국 최초의 국민차로서 20년간 도로를 지배했다. 2008년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헨리 포드 3세가 표현한 ‘세상을 바퀴 위에 올려놓은 차’였던 거다. 모델 T가 단종하던 1927년에 등장한 라살 모델 303은 ‘광란의 1920년대’를 주도했다. 단순·소박하고 실용적인 포드와 세련되고 화려하며 허세 가득한 라살은 한동안 미국사회를 움직인 두 축이 됐다.

1950년대 초반을 이끈 건 스포츠카 쉐보레 콜벳과 장식까지 요란했던 캐딜락. 2차대전 승리감을 고스란히 차에 실었다. 이후 비틀·마이크로버스, 이에 맞서다 고전을 면치 못한 콜베어가 혼재한 시대상은 앞서 살핀 대로다. 1960년대 중후반에는 포드 머스탱, 폰티액 GTO. 압도적인 ‘머슬카’가 등장해 젊은이를 열광케 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대 초에 터진 석유파동 탓이다. 관건은 이제 다이어트가 됐다. 머슬카에서 이코노카로 몸집을 줄이느라 고투를 벌인 틈에 끼어든 것이 혼다 어코드와 BMW 3 시리즈였다.

2000년대 키워드는 단연 친환경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도요타 프리우스가 나섰다. 콘셉트는 하이브리드. 미국서 대량판매한 최초의 하이브리드차로 이름을 올린다. ‘환경을 몹시 걱정하는 사람이 타는 차’란 이미지 메이킹을 덤으로 얹었다. 캐머런 디아즈, 리어나도 디카프리오, 캐럴 킹 등 배우와 유명인이 덥석 올라탔다.

▲자동차, 기술인가 철학인가

2011년 도요타는 디트로이트모터쇼에서 프리우스 3세대를 선언한다. 단일모델을 넘어 완전차종으로 확대한다는 거였다. 현장에 있던 저자가 “50년 뒤 프리우스가 받게 될 평가”를 물었단다. 운행여건은 고사하고 생존까지 불투명한 미래를 예측해보란 주문이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과거를 돌아보며 이런 말들을 했으면 한다. 세계의 자동차회사들이 프리우스 때문에 환경에 진지해졌다고. 프리우스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저자가 굳이 100년 여정을 프리우스에서 마친 이유가 보인다.

올해도 연초부터 디트로이트에선 모터쇼가 한창이다. 어마어마한 기량을 뽐내는 미래차가 줄줄이 섰다. 10단 자동변속기, 터보 직력 6기통 가솔린엔진, 1회 충전으로 320㎞를 달리는 전기차 배터리, 수소연료. 여기다 자율주행은 물론 운전자 스트레스 수치까지 측정하는 웨어러블기기까지. 하이브리드는 그새 옛말이 됐다.

자동차가 문명을 만든 건가, 문명이 자동차를 만든 건가. 결국엔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란 게 저자의 생각이다. 어쨌든 문명과 성공적인 접점을 이룬 차라면 미래 100년을 선점할 수 있을 터. 엔진에 기술만 붙일 건가 철학을 심을 건가로 해결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