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싸움에 새우등 터진 아베노믹스…엔고가 ‘복병’
by정다슬 기자
2019.08.12 05:30:00
일본 車회사 스즈키 2분기에만 790억원 환차손
도요타 영업이익 3% 증가서 3% 감소로 전망치 하향
엔고에 韓보이콧 겹쳐 관광객 4000만명 유치 빨간불
기준금리 -0.1%…정책여력 이미 소진해 대응책 부재
|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6월 29일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지역(G20) 정상회담을 맞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AFP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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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엔저’를 기반으로 ‘잃어버린 30년’을 되찾겠다던 ‘아베노믹스’가 역풍을 맞고 있다. 일본 경제가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불확실성 확대와 함께 엔화 가치 상승이라는 이중고(二重苦)에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기준금리 마이너스(-)로 끌어내린 상황이어서 통화정책으로 엔저를 지탱하는데 한계에 다다른 상태다.
“환차손만 69억엔(790억원)에 이른다”
일본 자동차회사 스즈키는 지난 5일 올해 4~6월 기준 영업이익이 전년동기 대비 46% 감소한 이유로 이같이 설명했다. 주요 수출처인 유로나 인도 루피 등에 대한 일본 엔화의 가치가 올라가며 영업이익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나가오 마사히코 이사는 올해 엔고 영향으로 영업이익이 150억엔 감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집계에 따르면 일본 상장기업들 388개사가 내년 3월까지의 실적 전망의 전제조건으로 예측한 환율은 평균 109엔이었다. 그러나 10일 기준 엔화 가격은 이미 105엔 중반까지 내려간 상태이다. 노무라증권이 시가총액 상위 300개사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109엔에서 105엔으로 떨어질 경우, 평균 영업이익은 약 1.44%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기업들은 잇따라 달러-엔 환율 전망을 수정하며 내년도 3월 기준 이익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고 있다. 도요타는 지난 2일 내년도 3월 기준 달러-엔 환율 전망은 1달러=110엔에서 1달러=106엔으로 낮추고 영업이익도 당초 전년 동기 3% 증가에서 3% 감소로 수정했다.
소니 역시 유로-엔 환율 전망치를 125엔에서 123엔으로 하향조정했다. 소니는 유로-엔 환율이 1엔 내릴 때마다 영업이익이 50억엔, 스바루는 100억엔 줄어든다고 밝혔다.
스즈키 뿐 아니라 엔고 여파로 타격을 입고 있는 일본 기업들이 적지 않다. 스미토모화학은 4~6월 기준 실적에서 환차손이 71억엔에 달했다고 밝혔다. 가와사키 중공업은 10년 만에 적자를 기록했다. 50억엔에 달하는 환차손 영향이 컸다.
마츠모토키요시홀딩스는 10분기만에 영업이익이 감소세로 전환됐다. 마츠모토키요시는 일본의 대표적인 약국 체인으로, 일본을 방문하는 해외 관광객들이 건강보조제 등을 구입하기 위해 한번쯤은 방문하는 곳이다. 그러나 엔고로 인해 해외 관광객 매출이 줄면서 영업이익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경제지표도 악화일로다. 일본 내각부가 8일 발표한 7월 경기동향지수는 전월 대비 2.8포인트 낮은 41.2로 3개월 연속 뒷걸음질했다. 수치로 봐도 구마모토 지진이 있었던 2016년 4월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엔고로 인해 2020년까지 관광객을 4000만명까지 늘리겠다는 아베 정부의 관광산업 육성 전략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지역 소도시 등을 향토색 넘치는 관광지로 개발해 왔다. 엔저로 일본 여행비용이 줄어들자 중국와 한국의 일본 관광객이 급증했다.
여행객들의 감소는 곧 일본 경제의 치명적인 타격이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관광산업 종사자는 전체 근로인구의 9.59%로 관광대국 터키보다 비중이 높다.
특히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로 한국인 관광객이 급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엔고는 업친데 덥친 격이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일본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 수는 386만 2697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01만 6370명) 대비 15만여명 넘게 줄어들었다. 엔화값이 가파르게 오르자 일본 대신 다른 나라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증가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일본 여행 보이콧이 본격화한 게 7월 이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타격은 더 커질 수 있다. 한국인 관광객은 일본 관광시장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영향력이 큰 손님이다. 일본 국토교통성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 753만명이 쓴 돈은 5881억엔으로 관광객 전체 소비금액의 13%를 차지했다. 중국(1조5450억엔)에 이어 두번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엔화 가치를 하락하기 위한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엔화가 오르고 있는 것은 미·중 무역전쟁의 격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세계 경제 침체 우려 등 글로벌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안전통화인 엔화로 글로벌 자금이 급속하게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중 갈등은 무역을 넘어 환율전쟁으로 확전되는 양상이다. 다른 국가들 역시 경쟁적으로 금리를 내리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본도 금리를 내려야 하지만, 현재 일본의 기준금리는 이미 -0.1%다. 금리를 내릴 수 있는 여력 자체가 없는 데다가 장기간 지속한 저금리로 금융시장의 체력 약화 등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구로다 하루이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달 30일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금융 완화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마이너스인 금리를 추가 인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금리 인하 대신 장기국채 매입 규모를 늘리는 등의 방식으로 통화량을 증대시키는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나카 다이스케 라쿠텐증권 객원 어드바이저는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달러-엔 환율이 100엔까지 떨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