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의 바이올린은 악마의 바이올린?
by조선일보 기자
2009.03.26 11:34:00
| ▲ 집시 바이올리니스트 로비 라카토시는 “즉흥 연주와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집시 음악은 재즈와도 닮아있다. 이 음악에서 나는 무엇보다 자유를 느낀다”고 말했다. /빈체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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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제공] 예후디 메뉴인(Menuhin·1916~ 1999)과 이다 헨델(Haendel·81)은 당대를 대표하는 남녀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둘은 1993년과 199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란히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지요. 하루는 이들이 콩쿠르 심사를 마친 뒤, 브뤼셀의 어느 클럽을 향해 총총 자리를 떠났답니다. 그 클럽에서 연주하는 집시 밴드의 바이올린을 듣기 위해서였다고 하지요.
당대의 클래식 바이올린 대가(大家)들을 서두르게 만든 주인공은 헝가리의 집시 바이올리니스트 로비 라카토시(Lakatos·44)입니다.
헝가리 집시 바이올린 명문(名門)의 7대손인 그는 3세 때부터 장난감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9세 때 아버지 밴드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습니다. 약관의 나이인 1985년에는 자신의 집시 밴드를 결성하고 15년간 브뤼셀의 클럽에서 연주하지요. 한국에 온 그는 "처음엔 3개월 계약으로 벨기에로 건너갔는데, 15년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다"며 웃었습니다.
메뉴인을 처음 만난 곳도 브뤼셀입니다. 라카토시는 "메뉴인은 연주회나 콩쿠르 심사가 끝나면 우리 클럽에 와서 새벽 4~5시까지 함께 술을 마시며 연주하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1989년 우승자 바딤 레핀, 1997년 우승자 니콜라이 즈나이더 등 콩쿠르 참가자와 심사위원 모두 클럽의 단골손님이자 라카토시의 '팬'이 됩니다.
집시 바이올린은 흔히 '악마의 바이올린'이라 불립니다. '세계 민담 전집: 집시 편'(황금가지)에는 재미난 유래가 실려 있습니다. 이웃집의 멋진 젊은이를 사모하는 소녀가 사랑을 갈구하자, 악마가 나타나 "네 부모와 형제 4명을 모두 내게 바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소녀는 결국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응낙하고 말지요. 악마는 소녀의 아버지를 바이올린으로, 어머니는 활로, 네 명의 형제를 4현(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래 뒤 숲 속에 버려진 바이올린을 아이들이 발견했을 때,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자 새들은 노래를 멈추고 바람도 잠잠해졌다. 슬픈 음악이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모두 슬퍼했고, 즐거운 음악이 울려 퍼지면 모두 기뻐했다"고 합니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유랑했던 집시들에게 바이올린은 삶의 시름을 달래고, 환희를 표현하는 악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장·단조를 엄격히 구분하고, 명확히 맺고 끊기를 좋아하는 클래식 바이올린과는 달리, 집시 바이올린은 웃음에도 눈물이 배어 있고, 슬픔의 끝에서 다시 희망을 노래합니다. 추방과 박해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을 보였던 집시의 삶과도 무척이나 닮아 있지요. 그 집시 바이올린을 들고 라카토시가 우리 곁을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