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차를 운전한다? 이젠 불법이오
by오현주 기자
2015.12.23 06:17:00
인공지능시대 미래상 추적
과학보다 인문학서 해결책 찾아
감정교감·직업까지 넘보는
똑똑한 기계와 공생 위해
변덕·비합리성·공감·연민…
인간다움 잃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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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시대, 인간의 일
구본권|344쪽|어크로스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싫다면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믿는 것이 좋을 거다. 로봇이 오고 있단 사실을. 그런데 답답한 건 잘 간파가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건데. 그들이 과연 친구냐 적이냐는 거다. 더 헷갈리는 건 가장 인간적인 영역으로 로봇이 들이닥치면서다. 미국의 맥멀렌이란 회사는 리얼돌이란 성인용 인형을 제작하고 있다는데. 이들은 조잡한 섹스용 인형을 섹스로봇으로 ‘키우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신체와 유사한 인형 몸체에 감성형 로봇기능을 결합하는 작업이다. 영국 트루컴패니언은 한참을 더 나아갔다. 세계 최초로 섹스로봇 ‘록시’를 상품화해 7000달러짜리부터 7만 5000달러(약 8700만원)짜리까지 다양하게 내놨다. 개발업체는 홍보전에 열을 올린다. 사회의 성적요구를 충족할 순기능을 첫줄로 세웠다. 그런데 말이다. 오로지 나만의 사랑인 줄 알았던 로봇 ‘사만다’가 동시에 641명과 사랑하고 있더란 걸 알게 된 영화 ‘그녀’(Her)의 인간 시어도어가 떠안은 상실감과 충격은 어쩔 건가.
감정뿐인가. 먹고사는 문제는 더욱 중차대하다. 미국통신사 AP는 기업의 분기실적 기사를 로봇기자에게 대신 쓰게 한다. 사람기자는? ‘데스킹’을 한다. 더 생산성 있는 기사를 못 써내느냐고 로봇에게 닦달을 하는. 험한 일을 도맡은 로봇 덕에 편한 세상이 왔구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잠시. 기자는 물론 비행기조종사·약사·의사처럼 지식·서비스산업의 전문직종마저 로봇이 꿰차게 되자 이젠 불안감이 엄습한다. 내 일자리를 10년 만이라도 지킬 수 있을까.
책은 다가올 인공지능과 자동화, 로봇시대를 어떻게 준비할 건가에 대한 난제를 던진다. ‘난제’라 한 건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모범답안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인식 로봇과의 교감이 바꿔놓을 인간관계, 로봇혁명이 뒤집은 직업의 미래 등은 어차피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지 않나.
뻔한 얘기는 말자. 착한 로봇, 나쁜 로봇 얘기는 접어두자는 말이다. 로봇이 품고 올 게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를 따지는 것도 식상하다. 이를 염두에 둔 듯 디지털 인문학자인 저자가 관심을 기울인 건 로봇과 사람의 건강한 관계다. 도구적 인간의 마지막 발명품인 로봇이 펼친 세상을 사는 법. 하지만 책이 시종일관 몰고 간 건 과학보단 인문학이다. 판은 기술이 벌였지만 기둥은 철학으로 채우자는 것이다. 오류로 가득찬 인간이 똑똑한 로봇과의 공생을 채워나가는 현실적인 대안을 이렇게 낸 셈이다.
▲무인자동차에 운전대를 내줄 수 있다?
소설가 황순원이 쓴 장편 ‘움직이는 성’(1968)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언덕길에 차 한대가 서 있는데,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안전하겠는가, 없는 것이 안전하겠는가. 황순원은 유신론을 얘기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세계를 지탱할 무엇은 필요하다는. 무게는 당연히 앞쪽에 실렸다. 그런데 반세기 만에 반박하기 어려운 반론이 나왔다. “앞으로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불법이 될 것이다.” 어째서? “너무 위험하니까!” 이 주장은 전기자동차업체 테슬라를 설립한 일론 머스코가 했다. 자율주행차 다시 말해 무인자동차가 사람이 운전할 때보다 훨씬 안전하며 사람은 결국 그 기계에게 운전대를 내줄 수밖에 없다는 논지다. 무인차의 세상에서 사람인 누군가가 차를 몰겠다고 우겨대면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
이 상황은 저자가 지적한, 로봇시대의 가장 원초적인 고민이다. 결국 윤리적 딜레마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무인자동차와 같은 기술은 하늘서 뚝뚝 떨어지게 돼 있다. 기술은 가장 쉬웠던 과제였던 거다. 결국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이 될 윤리적 딜레마는 사람이 풀 수밖에 없다. 이제껏 사람이 누린 특권이라면 우연, 무작위, 실수할 자유 등. 하지만 로봇나라에선 용납될 리가 없다. 사람을 대하듯 기계에게 너그러울 수는 없단 말이다.
▲나 대신 로봇을 쓸터요?
당장 긴장한 건 과학계다. 결국 자신이 연구하고 키워낸 로봇이 못내 염려스러운 석학들은 경고부터 날렸다. “사람보다 똑똑한 기계는 인류를 멸망시킬, 인류의 마지막 발명품이 될 것이다.” 기술철학자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기술이 지배하는 테크노폴리스란 국가의 시민이다. 좋든 싫든 새로운 질서에 속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테크로폴리스의 이웃은 당연히 로봇이다. 게다가 심하게 똘똘하기까지 한.
무인자동차를 시작으로 저자가 적나라하게 들이댄 현실은 사람이 아닌 로봇이 가져다줄 문명사적 변화다. 그 위협은 몇 가지 질문으로 대신했다. 실시간으로 자동번역이 되는 시대에 죽자고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 지식의 유효기간이 점점 짧아지는데 대학졸업장이 의미가 있나. 기억을 디지털기술에 의존하게 된 외뇌시대에 사람이 기억할 것과 기계가 기억할 것을 나눌 수가 있을까. 기계와 소통하자고 이젠 로봇의 언어를 배워야 하나. 물론 답은 없다. 다만 조언은 했다. 로봇을 피해 일을 찾지 말고 직업과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것.
▲기계와 인간이 다른 건
묵직한 불덩이는 떨어졌다. 저자는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입장이다. 기술이란 건 해당 업무를 해온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운명을 딛고 태어나니까. ‘드라이버’란 단어조차 ‘운전자’가 아니라 ‘가려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는 기계’로 뜻이 바뀔테니. 그렇다고 서둘러서 뭔가를 하자고 하진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사람답게 채우는 것이 로봇과 구별될 최후의 요소라고 못 박는다. 부정확한 인식과 판단, 변덕스럽고 비합리적인 행동, 하지만 공감하고 연민하는 속성이 바로 인간이란 소리다. 이런 것마저 로봇에게 던져버린다면 인간은 진정 사람다워지는 생명체 고유의 능력을 잃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최소한 인간성은 버리지 말자고 한다. 로봇시대를 후회 없이 잘못 없이 이끌려면. 어쨌든 로봇은 몰려오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