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혁신@미술]<6> '르네상스 최대 스폰서' 메디치家…다빈치 찾아내다

by오현주 기자
2020.07.24 04:10:02

▲메디치家와 ''의미의 창조''
비난의 대상이던 대금업으로 막대한 부 축적
보티첼리·미켈란젤로 등 예술·학문 적극 후원
''르네상스''란 전무후무한 문화사적 의미 창출
이윤만 좇는 사업은 한계…의미찾는 데 혁신

‘코지모 데 메디치 초상화’. 예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했던, 메디치가문의 신화를 만든 이다. 1518∼1520년경 자코포 다 폰토르모가 패널에 오일로 그렸다.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이주헌 미술평론가] “돈을 버는 것보다는 의미를 만드는 데 열정을 바쳐라.”

애플의 ‘치프 이밴절리스트’(Chief Evangelist·기술전도사)였던 미국의 유명 마케터 가이 카와사키(66)는 ‘의미를 만드는 것’이 혁신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혁신의 기술’을 주제로 한 테드 강연에서 열 개의 ‘팁’을 나열하고, 그 가운데 ‘의미를 만들라’를 첫 계명으로 꼽았다. 그에 따르면 “의미를 만드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면 돈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카와사키는 그 사례로 다음의 기업들을 들었다.

“애플은 ‘컴퓨터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컴퓨팅 파워를 모두에게 가져다주기를 원했다. 그것이 애플이 만든 의미다. 구글은 ‘정보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모두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이베이는 ‘거래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웹사이트가 있는 누구나 다른 큰 소매점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도록 했다. 유튜브는 사람들이 영상을 만들고, 업로드하고, 나눌 수 있기를 원했다. 이것이 기업과 그들이 만들고자 한 의미의 사례들이다.”

카와사키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비즈니스도 단순히 이익이나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그 차원을 뛰어넘는 의미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그 비즈니스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도 결국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혁신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고, 혁신이 없이는 성장도 없기 때문이다. 혁신은 바로 의미를 찾고 만드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문화혁신의 대명사인 르네상스가 메디치가문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말한다. 메디치가가 르네상스를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경제활동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문화활동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시로써는 심각한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던 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합리적인 경제활동이자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의미창출 활동이기를 바랐다. 그 열정적인 ‘투쟁’에서 그들은 결국 승리했다. 메디치가는 이처럼 비즈니스와 의미를 하나로 연결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메디치 머니’를 쓴 영국 출신 경제사학자 팀 팍스(66)는 메디치가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피렌체에 기반을 둔 메디치가문은 자본과 예술을 결합하여 피렌체 전체를 불후의, 그리고 불멸의 걸작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피렌체의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지 않았을 것이다. …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것은 바로 이 우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수라’(usura)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메디치가문에 번영을 가져다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는 대금업으로 집안을 일으켰다. 중세 유럽에서는 대금업을 신성모독과 같은 죄로 쳐서 심지어 “대금업자의 시신은 개나 소·말의 주검과 함께 구덩이에 묻는 게 마땅하다”(1274년 리옹공의회)고 할 정도였다. 그런 편견과 멸시를 딛고 큰 부를 일군 조반니는 아들 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에게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했다. 그 덕분에 코지모는 라틴어·헬라어·히브리어·아랍어에 능했고, 고문서를 숙독하고 철학을 공부하며 인문학자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인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젊은 날 고문서를 수집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까지 가려는 것을 아버지가 가까스로 말릴 정도였다.

‘메디치가문의 문장’이 든 조각. 1200년대 초에 만들어진 메디치가문의 문장은 6개의 붉은 원으로 장식했는데, 이후 가장 높은 원에 프랑스 발루아왕가의 문장인 3개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다. 동글동글한 공 모양을 두고는 여러 설이 있다. 메디치의 어원이 ‘메디슨’에서 유래하듯 약의 형체에서 따왔다는 설, 돈을 상징한다는 설 등.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이렇게 성장한 코지모가 예술과 학문의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예술과 학문에 대한 그의 남다른 이해와 사랑은 그에게 양립불가능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줬다. 당시 금융업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과 그 뿌리가 되는 기독교 교리는 금융업자가 대변하는 강력한 세속적 욕망과 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바로 이 신앙과 현실의 모순을 코지모는 예술로 극복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천재들의 손을 빌려 신을 찬양하고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메디치가의 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수 없었다.



코지모는 많은 고문서를 수집해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의 보고인 메디치가문 도서관을 설립했고, 산마르코수도원을 건축·회화의 빛나는 아이콘으로 재건했다. 괴팍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해 찬란한 두오모 성당의 돔을 설계하게 했고, 도나텔로·필리포 리피 등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의 든든한 뒷배를 보아줬다. 인문학 연구의 요람인 플라톤아카데미의 설립에도 관여하고 지원했다. 코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피렌체시가 그에게 국부(國父·Pater Patriae)의 칭호를 선사한 것은 누가 봐도 그 공적에 걸맞은, 당연한 예우였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코지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 이르러선 절정을 이뤘다.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로 불린 데서 알 수 있듯 로렌초는 르네상스의 가장 강력하고도 영향력 있는 후원자였다. 어릴 적부터 당대 최고의 석학들에 둘러싸여 공부한 로렌초는 그 스스로 탁월한 시인이었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늘 역사라는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돌아봤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거장들, 곧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을 적극 후원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도서관을 더욱 크게 확장하고 피사대와 피렌체대에 거금을 기부했다. 그런 그에 대해 ‘처세의 지혜’를 쓴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1483∼1540)는 “피렌체에 독재자가 있어야 한다면 이보다 훌륭하고 매력적인 독재자는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넘어 그 후까지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정신적·감성적 영향을 끼친 가문은 세계사적으로도 찾기가 어렵다. 메디치가는 이처럼 전무후무한 문화사적 의미를 창출한 집안이었지만, 더불어 당대의 가장 선구적인 금융인으로서 근대 경제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흑사병이 창궐해도 신용을 지켜야 한다며 은행 문을 닫지 않을 정도로 돈을 열심히 벌었으나 그렇다고 돈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메디치가 사람들에게 돈은 뿌리요, 정치는 줄기와 가지였으며, 문화예술은 꽃과 열매였다.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풍성하게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불휘 깊은’ 거목이라도 존재의 의미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 르네상스라는 대혁신을 선도했다.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수태고지’. 1442∼1443년에 제작됐다.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아름답게 재건한 산마르코수도원에는 안젤리코의 프레스코 시리즈가 곳곳에 들어 있다. 높이 230㎝ 너비 321㎝에 달하는 대작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미술관 소장.


메디치가뿐 아니라 많은 비즈니스 거장들에게서 우리는 ‘의미 추구’가 갖는 고귀한 혁신의 사례를 무수히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1863∼1947)는 어릴 적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말을 몰아 의사에게 달려갔으나 돌아왔을 때는 안타깝게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말보다 빠른 탈 것에 대한 갈망이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그 갈망이 그의 자동차 사업에 의미와 추진력을 더해줬다. 화가였던 새뮤얼 모스(1791∼1872)는 멀리 출타 중에 아내의 발병 소식을 들었지만 인편으로 소식을 접한 탓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장례식까지 끝난 뒤였다. 그것이 한이 된 그는 전신기술과 모스부호를 개발하게 됐다. 손을 자주 베이고 다치는 아내가 안쓰러워 약을 발라주던 존슨앤드존슨의 직원 얼 딕슨(1892~1961)은 자신의 부재중에도 아내가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반창고에 붕대를 붙이고 소독약까지 뿌린 ‘밴드에이드’를 만들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히트상품의 개발과 생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의미를 만드는 것은 비즈니스에 혁신을 가져올 뿐 아니라 무엇보다 삶에 보람을 가져온다. 그것이 꺼지지 않는 창조의 에너지가 된다.

라틴어로 ‘사용한다’란 의미의 명사다. 이로부터 ‘고리대금’ 혹은 ‘고리대금업’을 뜻하는 영어 ‘유저리’(usury)가 파생됐다. 메디치가문의 부를 만든 출발점인 우수라는 ‘개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돈놀이’로 풀이할 수 있다. 이 행위가 ‘천대받는 대금업’으로 몰렸던 것은 당시 교회법이 이자받는 일을 금지했기 때문. 메디치가는 이 문제를 이자라는 표현 대신 비용이란 개념으로 풀었다. 현대식으로 말해 채권자의 대출행위에서 발생한 손실 혹은 비용에 대해 보상차원에서 지급하는 것을 이자라고 가정해 교회법과의 충돌을 피했던 것이다. 우수라에서 출발한 메디치가의 금융업은 ‘메디치은행’을 만들면서 본격화했다고 볼 수 있다. 메디치은행은 로마은행에서 평사원으로 경험을 쌓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397년 피렌체에 세운 은행이다. 지주 딸이 결혼지참금으로 들고온 1500플로린(피렌체금화·지금 돈 12억원)을 쌈짓돈 삼아 8000플로린의 자본금을 들였다. 환전과 대부업을 주 업무로, 메디치은행이 첫해 8개월 동안 남긴 이익은 약 1200플로린(수익률 10%). 이후로도 오랫동안 교황청의 공식은행으로, 세계에서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자금을 관리했다.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