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혁신@미술]<14> 위대한 혁신가는 '휴머니스트'다

by오현주 기자
2020.09.18 04:10:01

▲조토와 휴머니즘
인물 인상·몸짓·감정…역동적 묘사 탁월했던 조토
정적 비잔틴의 중세말 사실적 조형으로 시대 앞서
BMW디자이너·킥보드개발자…'인간적 탈것' 고안
사람에 대한 공감·애정, 무한한 혁신 기회 제공해

조토가 그린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프레스코 벽화’ 중 ‘애도’(1304∼1306). 길이 13m, 폭 8.5m의 작은 예배당은 벽과 천장을 38면 구획으로 나눠 ‘수태고지’부터 ‘예수의 죽음과 부활’까지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꽉 채우고 있는데 ‘애도’는 그중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꼽힌다. 예수의 주검을 둘러싼 인물들이 내보이는 다양한 슬픔의 층위를 자세·동작·표정 등으로 전달해 당대인들이 충격을 받을 만큼 사실적인 것이 특징이다. 애도자들 중에는 등을 보인 인물도 등장하는데, 이 역시 조토가 창안해 즐겨 사용한 기법. 공간의 깊이감 이상의 연극적 효과까지 만들고 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6/7∼1337)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적인 조형으로 서양미술의 물꼬를 튼 위대한 혁신가다. 정적이고 양식화한 비잔틴 스타일이 압도하던 중세 말, 조토는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화면으로 시대를 앞서갔다. 르네상스가 열리기 한 세기 전의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 혹은 ‘르네상스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잔틴 스타일은 우리에게 ‘이콘’(주로 동방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화상. ‘상’(像)을 뜻하는 그리스어 이콘에서 유래했다)으로 익숙하다. 비잔틴 회화는 색채와 장식을 중시해 장엄하고 화려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미술이다. 공간의 깊이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탓에 공간이 얕다는 느낌을 주고 사물의 덩어리감도 떨어진다. 인물은 대체로 길게 그려졌는데, 눈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아 보기에 따라서는 왠지 만화 같은 인상을 준다. 치마부에(1240∼1302 추정), 두치오(1255∼1319) 등 당시 이탈리아의 주요 미술가들은 이런 비잔틴 스타일을 따랐다. 이 스타일은 인간의 시각적 경험이나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있는, ‘천상의 시각’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무렵에 비잔틴 스타일과 성격을 크게 달리하는 조토의 예술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조토는 아직 원근법이 창안되기 전이었음에도 매우 직관적으로 원근법적 표현을 시도했다. 광학적인 이해 또한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에 비해 매우 높았다. 무엇보다 대상을 견고한 입체로 표현할 줄 알았다. 그만큼 공간과 사물의 삼차원적인 특성을 잘 포착했다. 사람의 인상이나 제스처도 자연스럽게 묘사할 줄 알았다. 그에 더해 무엇보다 감정의 탁월한 표현으로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뛰어났다. 이 모든 게 그가 진정한 휴머니스트임을 보여주는 증표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시각과 감정으로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조토의 휴머니즘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1304∼1306)에서 생생히 살펴볼 수 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그 이름이 나타내듯 엔리코 스코로베니라는 사람이 지어 봉헌한 예배당이다. 대부업자였던 스크로베니가 미술사에 남긴 매우 중요한 공헌은 바로 이 예배당 내부의 벽화를 조토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조토는 벽화의 주제를 ‘구원’으로 잡았다. 구원의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예수의 생애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생애도 그렸는데, 이 두 생애를 그린 장면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고도 감동적인 장면은 ‘애도’다. 조토 특유의 사실적인 표현과 진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어서다.

‘애도’를 보노라면, 사랑하는 이와 사별하는 사람의 내적 고통과 슬픔이 절절히 느껴진다. 조토 이전의 화가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매우 생생하고도 현실감 넘치는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검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져 땅에 누워 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목을 감싸 안고 흐느껴 운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시선은 형언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에서는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이 팔을 벌린 채 예수에게 달려온다. 그 역시 격정을 못 이겨 온몸으로 애통해 한다. 예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그처럼 저마다의 몸짓으로 슬픔을 토해낸다. 하늘의 어린 천사들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죽음이 얼마나 서러운지, 아기 천사들은 제각각 애처롭게 통곡한다.

바로 이런 표현이 조토를 이전의 다른 화가들과 구별해주는 대표적인 표지다. 대상의 내면과 감정에 충분히 틈입해 들어가 이를 매우 실감나게 생생히 전달해주는 것 말이다. 물론 기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우리에게 조토의 표현은 여전히 고졸(古拙)하고 ‘나이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인간이 만든 이미지가 이 정도로 박진감 있게 다가온다는 게 매우 신기했다. 나아가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이 생생히 느껴지고 그들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하게 된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조토가 그린 ‘애도’의 부분.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천사’(왼쪽부터) ‘요한’ ‘마리아’다. 이전 화가들이 몰입했던 초자연적 현상을 버리고 인간적인 감정을 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떤 혁신이든 휴머니즘을 동반하지 않은 혁신은 진정한 혁신이 아니다. 창조와 혁신의 근원적인 목표가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은 조토를 비롯해 우리 주변의 많은 창조자와 혁신가들이 증명해온 바다. BMW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던 크리스 뱅글(64)도 그런 혁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휴머니스트로서 그는 자동차 디자인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자동차도 사람과 대단히 흡사해서, 자동차 디자인이란 ‘그 자동차의 성격을 외부로 표출하는’ 작업이다.”



자동차를 사람처럼 생각함으로써 그는 보다 ‘인간적인’ 자동차를 디자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자동차의 성격을 면밀하게 연구했고, 그렇게 파악한 성격이 과연 어떤 생김새로 나타날지 인간의 사례와 비교해가며 추출해냈다. 그렇게 해서 직선적인 스타일이 트레이드마크였던 BMW에 곡선의 새바람을 불러일으켰고(그로 인해 분노한 BMW의 ‘광팬’에게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결국 벤츠, 포드, 아우디 등 다른 브랜드들이 그 뒤를 따르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가 이런 추구를 한 바탕에는 대학시절 광범위하게 파고든 ‘문(文)·사(史)·철(哲)’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문·사·철’은 그로 하여금 자동차를 하나의 인간처럼 상상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케네스 클라크의 ‘누드의 미술사’를 읽을 때조차 그는 ‘누드’라는 단어가 나오면 대신 그 자리에 ‘자동차’라는 말을 바꿔넣어 읽었다고 한다.

어른들을 위한 초경량 미니 스쿠터(킥보드) 또한 ‘인정’(人情)의 경험으로부터 기원한, 한 휴머니스트의 창작물이다. 스위스의 은행원이었던 빔 오우보터(60)는 자신의 단골 소시지 상점이 집에서 걸어가기에는 좀 멀고 차를 타고 가기에는 가까워 고민하던 끝에 어른들이 타고 다니기에 좋은 초경량 미니 스쿠터를 개발했다. 그가 스쿠터를 착안한 계기는 어린시절 단란했던 가족 간의 추억에 있었다.

오우보터에게는 다리에 장애가 있는 누나가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누나는 한쪽 다리가 25㎝가량 짧았다. 그러다 보니 자전거나 스키를 탈 수 없었다. 그러나 스쿠터, 곧 킥보드는 곧잘 탔다. 그래서 오우보터의 부모는 아이들이 가급적 자전거를 타지 않고 스쿠터를 타도록 유도했다. 형제들이 장애가 있는 형제에게 공감하고 그 애로를 함께 나누도록 이끈 것이다. 그 덕에 그의 부모는 거의 매년 스쿠터를 한 대씩 새로 사야 했다. 이처럼 스쿠터는 오우보터의 가족에게 사랑과 연대, 배려의 상징이었다.

이 사랑의 추억으로부터 발원해 개발한 초경량 미니 스쿠터는 처음에 주변으로부터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일반적인 어린이용 킥스쿠터는 바닥판이 넓고 바퀴는 바람이 든 타이어인데 비해 그의 스쿠터는 판이 작고 바퀴는 스케이트 롤러였기 때문에 매우 민첩한 동작이 가능했고, 빠르고 매끄럽게 몰 수 있었다. 한마디로 보다 ‘인간 친화적’인 스쿠터였다. 그러나 그가 이 아이템을 사업화하려 하자 친구들은 어른들이 무엇 때문에 킥스쿠터를 타겠냐며 앞다퉈 그를 말렸다.

의기소침해진 그는 첫 개발품을 차고에 처박아놓고는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차고를 드나들던 이웃집 아이가 어느 날부턴가 그 개발품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곧 그 아이의 친구들이 몰려들면서 그의 스쿠터는 아이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는 탈것이 돼버렸다. 아이들이 사용하기에도 매우 편리했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다시 용기를 내 자신의 개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동료 인간에 대한 공감과 애정에 기초한 휴머니즘, 이것이야말로 끝없는 혁신의 기회를 제공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중세 이탈리아 피렌체파를 대표하는 화가다. 비잔틴 스타일의 형식주의를 취하면서도 조형성이 강한 중교화를 그렸다. 1270년대 말부터 1280년대에 걸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성모전’ ‘묵시록’ 등의 벽화를 제작했다. 이후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성당에서 ‘마에스타’(장엄의 성모·1280∼1290)를 그렸고 그의 유명한 대표작으로 남겼다. 현재 우피치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산타 트리니타 마에스타’는 길이 4m에 육박(385.2×223.6㎝)하는 패널화로, 무엇보다 아름다운 조형성이 눈에 띈다. 하지만 비잔틴 스타일 특유의 평면적인 구성에 입체감·공간감이 떨어지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치마부에가 키운 제자 ‘조토’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치마부에는 미술사에서 전환기를 이루는 13세기 후반 시대의 생활 감정, 취미의 변천 등 새로운 동향을 파악하고 반영해, 비잔틴 전통인 이차원적 회화양식에서 사실주의 양식으로 변환을 시도한 기여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조토와의 만남을 두고는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피렌체 근방 시골마을 베스피냐노에 갔다가 바위에 그림을 그리던 열살 남짓한 양치기 소년을 보고 재능을 발견해 피렌체로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그중 하나다.

조토의 스승으로 알려진 치마부에가 그린 ‘산타 트리니타 마에스타’(장엄의 성모·1280∼1290). 길이 4m에 육박(385.2×223.6㎝)하는 패널화로, 아름다운 조형성이 눈에 띈다. 하지만 비잔틴 스타일 특유의 평면적인 구성에 입체감·공간감이 떨어지는 구도를 보인다. 제자 조토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신화의 미술관’(2020),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