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즉위, 노량해전, 발해 건국…역사 속 무술년

by장병호 기자
2018.01.01 05:25:00

세종대왕, 600년 전 조선 4대왕 올라
이순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황룡사, 1238년 몽골 침입으로 소실
1958년 독일 뮌헨서 비행기 전복
역사의 흐름 바꾼 사건·사고 많아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2018년 무술년은 세종대왕이 조선 4대 왕으로 즉위한지 600년이 되는 해다(사진=뉴시스).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2018년 무술(戊戌)년 ‘황금 개’의 해가 밝았다. 역사 속 무술년에는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는 순간이 많았다.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받은 발해는 698년 건국했다. ‘애민정신’을 펼쳤던 조선의 4대왕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1418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노량해전에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장렬히 전사했다. 임진왜란에 종지부를 찍은 죽음이었다.

◇‘애민정신’ 몸소 실천한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하나다. 훈민정음 창제, 대마도 정벌과 4군 6진 개척을 통한 국방력 강화, 왕실 연구기관 집현전의 확대·강화, 물시계 자격루와 측우기 발명, 음악정리를 위한 정간보 제작 등 정치·군사·과학·음악·언어학 등 그가 남긴 업적은 후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1397년 조선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으로 태어난 세종대왕은 처음에는 왕위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어릴 때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한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늘 총명함을 보였다.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태종과 갈등을 빚었던 큰형 양녕대군과 불교에 뜻을 둔 작은형 효령대군 덕분이었다. 태종의 총애를 받던 그는 무술년인 1418년 8월 10일(양력 9월 9일) 22세 나이에 조선 4대 왕으로 즉위했다.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펼친 ‘애민정신’에 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은 언제나 백성을 생각한 그의 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는 즉위 600주년을 기념해 세종대왕을 주제로 한 뮤지컬·국악 등의 공연과 행사가 곳곳에서 열린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사진=이데일리DB).


◇임진왜란에 종지부 찍은 노량해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무술년인 1598년 일본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1597년 정유재란을 감행한 일본에 맞서 단 13척의 병력으로 명량에서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해를 통한 보급로가 끊기면서 위기에 처한 왜군은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조선에서의 철수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왜군의 퇴각을 순순히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일본에게 7년 동안의 전란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이에 왜군을 노량 앞바다(현 경남 하동군과 남해군 경계의 바다)로 유인해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 명나라 병력과 함께 노량에서 왜군과의 마지막 싸움에 나섰다.

4시간 동안 벌어진 치열한 전투 속에서 왜군은 200여척의 배가 분파되고 150여척이 파손돼 패배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승리의 분위기 속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11월 19일 오전 8시 무렵 이순신이 왜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이순신은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며 나라를 생각했다. 결국 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막을 내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고구려 다음으로 넓은 영토 ‘발해’ 건국

고구려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지녔던 발해도 무술년인 698년 세웠다.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계속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였다. 고구려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 동모산 일대에 발해를 세웠다.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연 발해는 동북쪽으로 영역을 넓혀 고구려의 영토를 거의 다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92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무술년 1238년에는 신라시대 들어선 사찰로 경주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진 황룡사가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됐다. 553년(진흥왕 14년) 건립을 시작해 569년 완공한 황룡사는 한국 전근대 역사에서 가장 높은 80m 가량의 9층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 때까지 위엄을 자랑했던 황룡사는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에 타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외국에서도 무술년에는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1238년 몽골제국은 러시아까지 영역을 넓혀 러시아 블라디미르를 잿더미로 만들기도 했다. 1838년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이 열렸으며 1898년에는 미국과 하와이의 합병, 동아프리카 식민지 확보를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이 극에 달한 파쇼다사건, 중국 캉유웨이가 추진한 정치운동인 변법자강운동도 일어났다.

1958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단이 탄 비행기가 뮌헨공항에서 이륙하던 중 기체가 전복돼 23명이 사망한 뮌헨 비행기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황룡사 복원 가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