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정치가 역설을 만나면

by이윤정 기자
2024.01.03 06:15:00

[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복잡한 현대사회는 말 속에 역설(逆說)을 많이 품는다. 평범한 명제들은 재미없으니 자극과 긴장을 불러오는 역설이 힘을 얻는다. 역설 중 가장 널리 회자된 예는 현대문명의 특징을 두 단어로 압축한 ‘고독한 군중’일 것이다.

일상에 광범위하게 떠도는 역설적 명제들도 있다. 이를테면 건강과 관련된 것으로 ‘저혈압이 고혈압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와 같은 말들이다. 상식의 뒤통수를 때린다는 점에서 격언처럼 들리는데, 알고 보니 실은 검증되지 않은 저급한 오해의 소산일 뿐이었다. ‘병원(病院)이 병을 만든다’는 역설은 병원에 들른 건강한 사람이 감염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주 엉터리는 아니겠다.

역설은 수사학과 문학의 영역이다. 짧은 한마디로 일상에 파묻힌 의식을 뒤흔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유치환 시인이 1936년에 쓴 시 ‘깃발’의 첫 구절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그 대표 격이다. 다만 그런 역설이 사회와 정치의 영역에서 작동할 때에는 좀 긴장할 필요가 있다. 가장 냉정해야 할 국가적 수준의 상황판단과 대응조치의 과정에서 수사적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역설적인 표현들은 격언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질문은 기본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말이 바로 ‘전쟁과 평화’의 역설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훈계를 여러 곳에서 듣게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 신년사에서 “상대의 선의에 의존하는 굴종적 평화가 아닌, 힘에 의한 진정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확고히 구축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힘에 의한 평화’는 자칫 ‘전쟁을 불사하는 평화’로 읽힐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적도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해질 뿐 평화는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러니 이 명제는 아무래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역설의 원형은 이런 것이었나 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 전쟁에 대한 경계 태세 없이 넋 놓고 있다가는 어느 순간 침략을 당할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평화는 깨지게 된다는 것인데 해를 이어 계속되고 있는 두 건의 해외 전쟁이 그 교훈이랄 수 있다.



말이라는 것은 몇 단계를 거치다 보면 심각한 변형을 겪는 예가 많다. 전쟁에 대비하라는 타당한 명제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를 거쳐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벌여야 한다”로 귀착할 수 있다. 아예 ‘전쟁은 곧 평화’라는 정신분열증적인 명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이미 경고한 바 있다.

2024년 새해를 여는 1월 1일 오전, 신년사를 발표하는 윤석열 대통령 모습 뒤로 이런 문구가 보였다. ‘국민만 바라보는 따뜻한 정부’. 그렇다면 국민을 바라보지 않는 차가운 정부였다는 말인가. 아니면 고급한 역설의 수사법일까.

하지만 올 신년사에서 최고 역설로 떠오른 문구는 ‘패거리 카르텔’이 아닐까 싶다. “자기들만의 이권과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을 반드시 타파 하겠다”는 대통령 말씀에 쏟아진 반응은 역설적으로 뜨거웠다. 특히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돼지 눈으로 세상을 보면 돼지만 보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단 하나, 권력만을 노리는 패거리 카르텔이 자신들이 뜻하는 대로 안 되면 상대를 패거리 카르텔로 지목하고 괴롭힌다”고 일침을 놓았다.

통찰력 넘치는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서 현대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도달하게 될 종말을 경고했던 조지 오웰은 풍자소설 ‘동물농장’에서는 정치권력을 부패하게 만드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동물들의 집단농장에서 인간을 몰아내고 지도자가 된 돼지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제1명제를 이렇게 역설로 변질시킨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