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없으면 감잎에라도 적었다"

by김용운 기자
2015.11.18 06:15:30

책벌레와 메모광
정민ㅣ252쪽ㅣ문학동네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글을 쓸 때 자리곁에 항아리 하나를 놓아두고 역사책을 읽다가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문득 써서 그 안에 던져두기를 또한 ‘독기’처럼 했다. 오래되자 베껴 써서 ‘옹기’라 하고 질문을 기다린다.”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머물던 저자는 도서관에서 ‘옹기’라는 책을 봤다. 독이나 항아리에 관한 게 아니라 중국 명나라 때 오승백이란 사람이 역사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을 적어나간 비망록이었다. 혹시나 찾아보니 오승백이 지은 ‘독기’란 책도 있었다. 서문에는 “글을 쓸 때 늘 궤 하나를 놓아두고 책을 읽다가 의혹이 생기거나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붓으로 적어 그 안에 던져두곤 했다”고 적혀 있었다. 오승백은 메모의 내용에 따라 옹기와 궤를 나눠 보관했는데 결국 독서를 하다 남긴 메모를 바탕으로 엮은 ‘옹기’와 ‘독기’를 쓰기에 이르른다.



저자는 수백년이 흘러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고전 저술가들을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옌칭도서관에서 확인했던 오승백을 비롯해 정약용, 이덕무, 박지원 등 대가들이 자신이 그러하듯 일상적으로 책을 읽고 메모를 남겼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어서다. 삶에서 책을 빼면 남는 것이 없고 종이가 없으면 감잎에라도 생각을 붙잡아두려고 했던 옛사람들을 불러와 독서와 메모에 관한 마니아적 애정을 함께 나누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