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판 흔든 국정원 댓글사건 시작은 오피스텔 습격사건

by한광범 기자
2017.08.31 05:00:00

민주당, 김하영 거주지 기습해 댓글공작 의혹 처음 외부에 알려
검찰, 윤석열팀 구성..朴정권 외압 속 원세훈 기소
2심 실형 후 대법 파기 환송 우여곡절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30일 오후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후 서울고등법원에서 구치소로 향하기 위해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8대 대선이 임박한 2012년 12월 초 민주통합당은 국가정보원 전직 직원인 김상욱씨를 통해 국정원이 사이버 공간에서 불법 선거 운동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첩보 확인을 통해 민주당은 같은 달 11일 국정원 불법선거 개입 의혹의 핵심 당사자인 김하영씨의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 주거지를 알아냈다.

국정원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민주당 당직자와 취재진 수십명이 김하영의 거주지 607호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김씨는 그날 오후 7시30분경부터 13일 오전 11시까지 경찰과 민주당 관계자들의 ‘문을 열어달라’는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김하영의 이른바 ‘셀프 감금’이었다.

컴퓨터 전문요원이었던 김씨는 그사이 국정원 상부와 연락하며 자신의 PC 2대에 있는 공작 흔적들을 완벽히 삭제했다. 그는 13일 오후 국정원 요원들이 도착한 후 그들과 함께 오피스텔을 빠져나가며 이 빈껍데기 PC 2대를 경찰에 제출했다.

경찰은 이 두 대의 PC 분석 결과를 토대로 대선을 사흘 앞둔 16일, 그것도 밤 11시에 느닷없이 “김하영의 혐의점을 찾을 수 없다”는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는 민주당 문재인 후보(현 대통령)에게 초대형 악재가 됐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전 대통령) 측은 “민주당이 무고한 여성을 위협했다”는 식의 역공을 폈다. 대선은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국가정보원 직원 김하영씨가 2012년 12월 13일 서울 역삼동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경찰과 국정원, 선관위 관계자가 입회한 가운데 경찰의 증거자료 수집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경찰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인 2013년 4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하영 등 국정원 직원 3명에 대해서만 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국정원 윗선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은 엉터리 수사였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채동욱 당시 총장의 주도 하에 특별수사팀을 구성했다.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현 서울중앙지검장)을 팀장으로 하는 특별수사팀은 빠르게 국정원 댓글 공작에 대한 실체를 파고 들어갔다. 포털 사이트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댓글 공작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통성을 위협받을 위기에 처한 박근혜 정부의 반격이 본격화하면서 수사팀은 위기에 몰렸다. 새누리당은 특별수사팀 검사들을 ‘좌파’로 낙인찍었고, 관계기관들은 수사 협조를 거부했다.

수사팀이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추진했지만 국가보안시설이라는 이유로 국정원이 제출한 자료 외에는 확보가 불가능했다. 수사팀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혼외자 논란으로 자리에서 결국 물러났다.

수사팀은 2013년 6월 댓글 의혹과 관련해 원 전 원장,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을 공직선거법 및 국정원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했다. 경찰의 엉터리 수사결과와 관련해선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선거법과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추가 수사를 벌이던 윤석열 팀장이 같은 해 10월 상부 보고 없이 전결로 국정원 직원들을 체포했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쫓겨났다.

윤 팀장은 같은 달 열린 국정감사에서 수사팀에 대한 외압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그는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에게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언급하자 “야당 도와줄 일 있느냐?”며 “정 하려고 그러면 내가 사표 내면 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윤 팀장은 당시 국정감사장에서 남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윤 팀장과 박 부팀장은 고검으로 좌천됐다. 수사팀도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지방에서 근무하다 재판이 있는 날 서울에 올라오는 일을 반복했다. 공소유지를 이끌던 박 부팀장은 결국 사표를 내고 검찰을 떠났다.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이 2013년 10월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위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원 전 원장에 대한 1심 판결은 2014년 9월 선고됐다. 정치관여는 맞지만 선거 관여는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원 전 원장에 대해선 국정원법 위반만 적용돼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다음 해 2월 서울고법 항소심 판결에선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심과 달리 ‘시큐리티 파일’과 ‘425지논 파일’이 증거로 인정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를 통해 2015년 7월 다른 부분에 대한 판단 없이 두 파일에 대한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2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환송했다.

파기환송 사건은 같은 달 사건이 서울고법 형사7부에 배당됐다. 검찰은 법정에서 변호인뿐 아니라 재판장인 김시철 부장판사와도 지속적으로 신경전을 벌였다. 김 부장판사는 지난 2월 타 재판부로 인사가 나기 전까지 거센 논란의 중심에 섰다. 원 전 원장에게 보석을 허가해준 것을 시작으로 ‘심증’을 드러내는 심리로 검찰의 거센 반발을 샀다.

국정원 댓글 공작에 대해 ‘손자병법’을 인용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탄력적 용병술’이라고 언급해 검찰이 법정에 박차고 나가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검찰과 변호인 측의 심리 종결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 2월 법관 정기 인사를 통해 재판부를 떠났다.

새로 재판장에 부임한 김대웅 부장판사는 빠른 심리를 약속했다. 하지만 5월 정권교체 후 국정원의 과거 대선개입 실상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검찰은 국정원에서 넘겨받은 문건들을 추가로 증거로 제출했다. 계속돼 국정원 정치공작 행태를 입증할 문건이 나오는 와중에 검찰은 결국 선고를 이틀 앞둔 지난 28일 변론재개를 재판부에 신청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에 대해 불허 결정을 했다.

예정대로 판결에 나선 재판부는 검찰이 최근 국정원에서 제출받은 문건들을 근거로 원 전 원장의 대선개입 혐의를 인정하고 검찰 구형과 같은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원 전 원장은 2년여 만에 다시 구치소에 수감됐다. 검찰은 “법원이 원 전 원장의 오늘 판결에서 응분의 책임을 물은 것”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한직을 떠돌던 국정원 특별수사팀 멤버들은 정권 교체 후 윤석열 전 팀장이 지검장을 맡은 서울중앙지검에 집결했다. 검찰은 떠난 박형철 전 부팀장도 문재인정부 출범 후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으로 영전했다.

현재 검찰은 정권교체 후 외부로 공개되는 국정원 내부 문건을 토대로 국정원의 정치공작에 대해 추가 수사에 돌입한 상황이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국정원 외부의 민간인 댓글팀 30개의 실체도 밝혀진 상황이다.

검찰은 수사 결과를 토대로 원 전 원장에 대해 추가 기소까지 고려하고 있다. 검찰의 수사 칼날은 원 전 원장을 넘어 이명박 전 대통령을 향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