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조선일보 기자
2003.11.16 19:08:32
[샐러리맨의 반란] <上>샐러리맨 "2막 인생" 신드롬
[조선일보 제공] 지난달 KT의 통신망 관리 부서에서 명예퇴직한 조성환(46)씨는 다음달부터 보안업체로 출근한다. 그는 정년까지 아직 10년 이상 ‘자리’가 보장돼 있었다. 조씨의 전직을 단순 셈법으로 계산하면 적자다.
연봉이 당장 2000만원 정도 깎이고, 각종 복지혜택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씨의 셈법은 다르다.
“인생이 정년 58세에 끝납니까? 인생은 50+30, 60+20입니다. 보안업체 쪽으로 옮겨서 일하면 나머지 ‘플러스 20’과 ‘플러스 30’을 살아갈 수 있는 뭔가 다른 일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지금이 그런 도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입 자동차업체인 BMW코리아 이사였던 한상우(44)씨도 스스로 사표를 내고 강원도 춘천과 서울 장위동에 고기 전문점을 열고 프랜차이즈사업에 뛰어들었다.
사표를 낸 직후 시작했던 식당을 지난 5월 아예 법인으로 만들어 ‘기업 경영’에 나선 것이다. 한씨는 “정년을 다 채우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어서 ‘그 다음’ 인생을 오히려 망칠 수 있다”면서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말했다.
평생직장 붕괴와 임박한 고령화 사회라는 변화 속에서 샐러리맨들이 새로운 생존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의 명예퇴직은 ‘눈물의 파티’로 불리는 등 타의에 의한 고통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30대가 자발적으로 희망퇴직에 동참하는가 하면, 40·50대들 중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전직과 이직을 시도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사오정·오륙도’(45세면 정년, 56세까지 직장 다니면 도둑놈이라는 직장인들의 자조적인 표현)에 이어, ‘38선 붕괴’(직장에서 이미 38세에 퇴출이 시작됐다는 얘기)라는 말이 나돌 만큼 ‘월급쟁이의 수명’은 줄고 있지만, 평균 수명은 늘어나면서 30~40년간의 간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기간의 간격을 ‘인생 2막’으로 활용하려는 샐러리맨들의 적극적인 생존술(生存術)이라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한국 샐러리맨들이 체감하는 월급쟁이 수명은 36.5세(채용 정보업체 잡링크의 3126명 직장인 조사 결과). 하지만 생물학적 평균 수명은 남자 72세·여자 80세로, 두 ‘수명’ 간의 괴리는 30년이 훨씬 넘는다.
잡링크 한현숙 사장은 “그 30년간 인생의 귀중함에 대한 샐러리맨들의 자각이 지난 10월 5505명이 한꺼번에 명예퇴직을 신청한 ‘KT 명퇴 쇼크’로 나타났다고 본다”고 말했다. 월급쟁이들의 자발적인 전·이직이 늘어나는 현상은 ‘2막 인생’에 대한 샐러리맨들의 열망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고용보험 이직자(피보험 자격 상실자) 현황을 분석해봐도 샐러리맨들의 이 ‘열망’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1년 전체 이직자 323만4745명 가운데 전직·자영업·결혼·육아 등 자발적 이직자 수는 232만8339명으로 72%. 이것이 지난해에는 전체 이직자 340만4669명 가운데 256만4066명으로 그 비중이 75.3%로 증가했다.
노동부 최기동 고용보험과장은 “최근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비자발적 이직자가 다시 늘어나는 추세”라며 “그러나 비자발적 이직자로 계산되는 명예퇴직자 중에도 실제로는 상당수 자발적 이직자가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2막 신드롬’에는 우리 사회의 발전 잠재력을 위축시키는 위험요소가 숨어 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엔지니어 출신이건 마케팅 담당자건, 샐러리맨들이 새롭게 개척하는 분야는 생산적인 창업으로 연결되는 경우보다 자신의 경력과 무관한 부동산 중개업소나 음식점 개점, 자격증 사업 등 단순 서비스 업종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노동연구원 유길상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노동시장은 직업이 아닌 직장 중심이어서 이직과 동시에 과거의 경력과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인생 2막’에 대한 샐러리맨들의 열망이 소규모 자영업이나 자격증 위주의 안정적인 직업으로만 연결되면 사회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인력 낭비”라고 말했다.
(산업부 기획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