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잡기 위한 혁명적 조치 필요‥보유세 선진국 수준 강화"

by장순원 기자
2018.09.11 06:00:00


집값 불쏘시개 촉발한 솜방망이 보유세
소득주도성장 방향은 맞지만 디테일이 문제
일자리·최저임금 보완‥규제 풀어 투자 유인
"은산분리 규제완화조차 막는 원리주의 팽배"
기업 사회적 역할 강화‥서민 보증지원 확대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사진=이데일리 방인권 기자)


[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치솟는 집값을 잡기 위한 혁명적 조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부동산 보유세를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멘토 박승 전(前) 한국은행 총재가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대해 ‘진보 정권의 치욕’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근본대책이 필요한데 경기부양수단으로서 접근법을 버리지 못해 어정쩡하게 타협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서도 방향은 맞지만 디테일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 총재는 문재인 캠프의 싱크탱크 ‘정책공간 국민성장’ 자문위원장을 역임하며 ‘J노믹스’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박 총재는 10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부동산시장의 불안을 큰 사회적 문제라고 지적하며 “이번 보유세(종합부동산세) 개편안은 진보정권의 개혁성 부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지난 7월 다주택자들의 세(稅) 부담을 더 무겁게 하는 방향으로 종합부동산세제 개편방안을 공개했다. 전반적으로 시장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강도가 약해 ‘종이호랑이’란 평가를 받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여의도·용산 통합개발계획 발표와 어우러지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집값 급등의 불쏘시개가 됐다.

박 총재는 “부동산은 서민에게는 사는 생활공간, 정부는 국민생활안정공간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축재(蓄財)와 경기부양수단으로 변질했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경기가 나쁘면 부동산을 자극해 고용을 늘리고 성장률을 올리는 행태를 되풀이했고 이 과정에서 발 빠른 투자자들이 과실을 먹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는 것이다. 수 십년째 이어온 부동산시장의 적폐를 끊어내려면 혁명적인 조치가 필요한데 문재인 정부도 이런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박 총재는 “치솟은 집값은 소득이 높아져도 삶의 질은 악화하는 빈곤화 성장의 원인”이라며 “현재뿐 아니라 후손의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어 “부동산은 근본을 다스려야 하는 문제”라며 “부동산의 사회기능을 원래대로 돌려 개인에게는 축재의 수단이 아닌 사는 곳, 정부는 경기부양수단이 아니라 국민생활안정공간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총재는 “쓸데없이 부동산을 갖고 있지 않도록 유도하는 게 첫걸음”이라며 보유세를 선진국 수준으로 단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선진국은 보유세가 집값의 1.5% 수준인데 우리는 0.2%에 불과해 주택보유 수요가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보유세를 평균 1.5%까지 올리는 로드맵을 짜 국민에게 공개해야 한다”며 “특히 누진율을 적용해 5억원 이하 주택은 낮은 세율을 매기고 20억원 이상의 고가주택은 중과세한다면 부동산 과열은 자연스럽게 잡힐 것”이라고 했다.



박 총재는 비판이 커진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2008년 이후 수출이 성장을 견인하던 시대가 막을 내린 상황에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려면 내수를 늘려야 하고 이는 결국 가계소비 확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정책의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최저임금과 정부주도의 일자리정책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박 총재는 “미국이나 일본, 유럽선진국도 최저임금을 대폭 올렸는데 자영업자 생산성이 높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며 “우리는 자영업자들이 영세하고 생산성이 낮아 최저임금 소득자와 마찬가지 빈곤계층이다. 최저임금이 급히 오르다 보니 비슷한 처지인 영세 자영업자의 소득은 물론 고용마저 줄어 전체 저소득층 소득이 감소한 요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영세자영업자는 최저임금을 별도로 적용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일자리정책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기업이 국내투자를 기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는 것은 불가피하다”면서도 “일자리 창출은 기업 몫으로 정부는 보완적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대신 정부는 민간이 국내에 투자하도록 촉진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규제혁파나 노사관계의 개선, 인허가 간소화를 비롯해 교육비, 집값 같은 투자원가를 낮춰주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의료나 바이오, 로봇 인공지능(AI)과 같은 4차산업 분야에 창업과 고용 확대를 위해 과감한 규제 완화를 주문했다. 박 총재는 “기본인 은산(銀産)분리 규제조차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지도층 가운데 이념적 원리주의에 갇힌 분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고 쓴소리를 했다. 이어 “경제는 시장을 다루는 곳이기 때문에 친서민뿐 아니라 친시장, 친기업 정책이 필요하다”며 “정부와 기업의 상생협조관계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문도 곁들였다. 대표적인 게 사회공헌활동이다. 민간에서 저출산이나 남북교류, 저소득층의 생활이나 교육분야에서 보탬이 될 만한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이자장사를 한다는 비판은 받는 은행권을 예로 들며 “가계대출이 늘고 부실채권은 줄어든 반면 경영다각화를 통해 은행 수익이 많이 늘었는데 이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은행이 이익을 금융과 사회발전에 유용하게 쓰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총재는 하나금융그룹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박 총재는 아울러 “미소금융이나 햇살론, 새희망홀씨대출과 같은 서민금융상품이 나왔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며 “정부가 나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신용보증을 만들어 은행 등의 금융기관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한국에서는 아직도 나만 잘살면 된다는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생각 탓에 심각한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우리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로 갈 것이다. 공동체적 성장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