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일년에 단 하루인데"…배려·아량 사라진 수능 단상

by이슬기 기자
2017.11.25 08:00:00

[이데일리 이슬기 기자] 포항 지진 여파로 일주일 연기된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실시된 23일. 서울 아침 기온이 영하 3도까지 내려가는 등 이날도 어김없이 ‘수능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현장 스케치를 위해 찾은 서울 서초구 반포고 앞에는 롱패딩·목도리 등으로 중무장한 학생들이 수험생인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 있었다.

‘대박 나서 서울대 가라’ ‘네 답이 정답’ 등 재기발랄한 격려의 글을 담은 플래카드들이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수능과 얽힌 특별한 추억이 없는 터라 이런 광경이 조금은 생소했지만, TV뉴스에서만 보던 모습에 기분이 살짝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꽹과리나 북 등 익숙한 응원 도구는 보이지 않았고 고사장 앞엔 영동고 학생들 수십 명뿐이어서 기대(?)와 달리 응원전은 조금 밋밋했다. 핫팩과 학원 전단지를 돌리러 나온 아주머니들이 되레 당황할 정도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인근 주민들이 시끄럽다고 항의해 학교 측에서 미리 응원을 자제해 달라고 했던 모양”이라고 귀띔했다. 가뜩이나 매서운 추위에 고사장 앞 분위기는 더욱 썰렁했다.

꼭두새벽부터 요란한 응원 소리가 성가실 수 있다. 하지만 수험생 선배들의 건승을 빌고 후배들의 응원에 힘입어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는, 일 년에 단 하루 볼 수 있는 훈훈한 풍경이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에서 ‘수능’이란 두 글자가 갖는 무게를 생각한다면, 오로지 이날을 위해 견뎌온 수험생들을 위해 조금 아량을 베풀어도 되지 않을까. ‘소음 민원’을 낸 주민들의 자녀도 언젠가는 수험생이 되고 자신들은 수험생 학부모가 될 텐데 말이다.

요즘 들어 갈수록 우리 사회가 삭막해진다는 걸 느낀다.

카페에서 어린 아이 울음소리만 들려도 젊은 사람들은 눈썹부터 찌푸리고, 도서관에선 ‘딸깍’ 펜 누르는 소리마저 타박을 하곤 한다. 여유가 없다보니 배려하는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다. 이날 썰렁한 고사장 앞 풍경도 이런 삭막해진 우리 사회의 속살처럼 보였다.

오전 8시 40분 수능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교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학부모로 보이는 2~3명만 남아 교문 앞을 지켰다.

“에잇, 공쳤네. 이거나 좀 받아가슈.” 정시 설명회 전단지를 한아름 안고 있던 한 아주머니는 남은 핫팩 몇 개를 기자에게 넘기고선 종종 걸음을 쳤다. 핫팩도 어느새 식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