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경제] `인타임` 속에 중앙은행이 있었다면…
by김일문 기자
2012.03.28 07:42:31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3월 28일자 16면에 게재됐습니다. |
[이데일리 김일문 기자] 작년 말 개봉된 ‘인타임’은 “시간은 곧 돈(금)이다”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격언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은 영화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먼 미래 화폐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몸 속에 내장된 시간을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커피 1잔에 4분, 스포츠카 1대 59년. 생산 활동의 대가도 시간으로 채워지며, 소비 역시 시간으로 계산된다. 영화 속 미래에도 빈부 격차는 존재하는데, 부자는 수백 년의 시간을 축적해 영생하고, 가난한 사람은 하루를 겨우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노동으로 사거나 빌려야 한다. 만약 충분한 시간을 벌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설정이다.
발상 자체는 신선했지만 이 영화는 몇 가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 존재한다(물론 조악한 스토리 전개로 흥행에도 별다른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화폐를 시간으로 대체한 것이지만 화폐의 본질적인 기능과 거시 경제 측면에서 영화와 현실은 괴리가 있다. 허구의 상황임을 감안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 ‘인타임’이 현실 세계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먼저 현실 세계에서 화폐의 특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화폐는 크게 3가지 기능을 갖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교환매개의 기능이다. 소비자는 갖고 싶은 물건이 있을 경우 화폐라는 지불 수단을 통해 재화를 얻을 수 있다. 두 번째는 가치 척도의 기능이다. 상품의 가치는 화폐의 단위로 표시돼 경제 활동의 판단 기준이 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영화 속 시간이 현실 세계의 화폐를 100% 대체 가능하다. 등장 인물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시간을 지불하고(교환 매개의 기능) 값이 매겨진 재화를 획득(가치 척도의 기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시간은 화폐의 세 번째 특징인 가치저장 기능이 없다. 돈으로 창출할 수 있는 구매력을 보관해 주지 못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지금 내 수중에 있는 100원은 지금 당장 소비에 써버릴 수도 있지만 아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시간은 저장할 수 없다. 노동으로 1시간이라는 돈을 벌었다면 삶을 연장할 수 있는 기간이 생겼을 뿐이다. 결국 영화 속에서 개인은 소비를 강요당하고, (시간) 저축을 통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따라서 시간이 넉넉지 않은 사람은 시간이 멈추지 않는 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빡빡한 삶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이 영화의 초반에는 흥미로운 설정이 있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갑자기 오른 버스비를 내지 못해 길거리에서 시간을 허비하다 죽음을 맞는 장면이다. 한정된 재화를 소비해야 하는 경제 상황하에 물가 상승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과학 기술이 발달해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아진 미래라 하더라도 모든 수요를 충족시켜 줄 도깨비 방망이가 존재하지 않는 한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가격은 매겨지기 마련이며, 수요가 공급보다 많으면 자연스럽게 가격은 올라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물가 상승은 화폐 가치의 하락을 의미한다. 물가가 오르면 상대적으로 돈의 가치는 떨어진다는 얘기다. 따라서 사람들은 통화 가치의 하락분 만큼을 채워넣으려 할 것이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름값이 상승해 버스비가 하루아침에 3분에서 4분으로 올랐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은 시간 임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시간 대출을 받아 비싸진 버스비를 충당할 것이다. 하지만 시중 유동성이 많아지면 이는 다른 재화의 가격을 자극해 또 다른 물가 상승을 야기할 수도 있다.
만약 시간을 관장하는 중앙은행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간의 발권력을 동원하거나 흘러가는 시간을 느리게, 혹은 빠르게 유동성을 조절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중앙은행이 있었다면 영화의 스토리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가 상승이 우려된 중앙시간은행은 1분에 60초인 기준시간을 30초로 전격 낮추기로 결정한다. 분(分)당 시간의 가치가 종전보다 2배로 높아진 셈이다. 현실세계에서 기준금리를 높인 효과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소비는 크게 위축된다. 시간을 꾸기보다는 갖고 있는 선에서 맞춰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중앙시간은행이 선제적인 시간 긴축 정책에 나섰더라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소비 활동도 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 어머니도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은 없지 않았을까.
영화 ‘인타임’에서 시간으로 매겨진 각종 재화의 가격을 현실 세계에 적용시키면 그 수준은 어느 정도나 될까?
먼저 현실 가격과 영화 속 시간의 환금 비율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 속에서는 다양한 서비스와 제품이 시간으로 표현되는데, 엄마가 아들에게 건네주는 점심값 30분과 대한민국 직장인의 평균 점심값(통계청 작년 발표기준)인 6000원을 기준으로 비교해 보자.
점심식사 30분=6000원으로 가정하면 1시간은 대략 1만2000원. 이 수식을 1인당 국민소득 2400만원(한국은행 2010년 기준)에 적용시키면 2000시간 정도다. 이를 다시 24시간으로 나누면 83일이다. 즉 우리나라 국민들의 1인당 소득 수준으로는 영화 속에서 석 달 정도를 살 수 있다.
이를 전국 집값 평균(2억 6284만원, 국민은행 조사 기준)에 대입시키면 912일이며, 가계 연 평균 생활비(2인 기준 240만원, 작년 통계청 조사)로 따지면 8일이다. 또 자녀 한 명 당 월 평균 사교육비(24만원, 작년 통계청 조사)는 20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