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권보경 기자
2021.01.29 00:05:18
약국·보건소에 폐의약품 반납 국민 26% 불과
제도 공백·운영 부실로 폐의약품 여전히 ‘처치곤란’
약국 “폐의약품 받지만 지자체 관리 소홀해”
폐의약품 매립 시 토양오염·생태계 교란 부작용 우려
경기도 고양시에 거주하는 허진숙(52·여)씨는 폐의약품을 버릴 때마다 약국을 찾는다.
허 씨는 알약은 알약끼리, 물약은 물약끼리 분류해 약사에게 가져간다. 폐의약품을 건넬 때면 종종 싫은 티를 내는 약사도 있다. 적은 양을 버릴 땐 약국까지 가기가 귀찮기도 하지만 꼭 약국을 찾는다.
그는 “폐의약품을 음식물과 버리면 동물 사료에 섞여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일반 쓰레기로 버려도 흙과 섞여 결국 우리 몸에 좋지 않을 것”이라며 “환경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서 꼭 약국에 가져다 준다”고 덧붙였다.
환경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폐의약품 처리가 허술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관련 규정도 부실할뿐만 아니라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다.
지자체 33%만 폐의약품 처리 관련 조례 있어
폐의약품은 질병 및 신체손상 등 인간의 건강과 주변 환경에 피해를 유발 할 수 있는 폐기물인 ‘생활계 유해폐기물’이다.
일반 쓰레기로 버려선 안 되고 약국이나 보건소에 따로 배출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19년 11월 20일부터 12월 3일까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폐의약품을 약국이나 보건소에 배출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26%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허 씨처럼 약국에 폐의약품을 배출해도 일반 쓰레기로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폐의약품 관리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것.
현행 폐기물관리법 제14조의4에 따르면 지자체장은 생활계 유해폐기물의 적정 처리를 위한 기술적, 재정적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같은 조치가 미비한 상황이다. 2019년 11월 국민권익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228개 기초지방자치단체 가운데 폐의약품 수거와 관련해 조례가 있는 지자체는 32.7%인 74곳에 불과했다.
서울시 종로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A씨는 “주민들이 폐의약품을 약국에 가져오면 받아준다"면서도 "우리도 일반쓰레기로 버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폐의약품을 모아 보건소에 가져가도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종로구 보건소 관계자는 이에 대해 "(폐의약품) 관리 주체를 보건소라고 보긴 어렵다”며 "보건소도 약국처럼 폐의약품을 모았다가 배출하는 곳"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주민들이 가져오는 폐의약품은 받는다"며 "폐의약품은 폐기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구청 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구청으로 폐의약품을 보내 처리하느냐는 질문엔 “자체적으로 소각한다”고 했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지역 약사회나 보건소에서 폐의약품 처리를 의뢰할 경우 수거해 소각한다"면서도 "수시로 수거·소각하는 게 아니다보니 약국에서는 폐의약품 처리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례 있어도 문제...“지자체 수거 의지 부족해”
관련 규정이 있더라도 실효성 있게 운영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1차적으로 폐의약품을 수거해 보건당국에 전달해야 할 약국들이 일반쓰레기로 폐기하더라도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서다.
서울시 마포구에서는 구청이 구 보건소에 모아놓은 폐의약품을 수거해 소각한다.
하지만 약국에 쌓이는 폐의약품을 보건소에 가져다 주느냐는 약국 자율이다.
마포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B씨는 “보건소에서 폐의약품을 받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며 “우리가 직접 그 시간에 폐의약품을 보건소에 가져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혼자 약국을 하다 보니 약국을 비우기가 힘든 게 문제”라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양이 많아 부탁하기도 곤란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환경보호를 위해 폐의약품 관리가 중요하다면 지자체가 좀 더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마포구의 다른 약국 약사 C씨도 “폐의약품을 모아 보건소에 가져다주는 일이 번거로운 게 사실"이라며 "폐의약품을 모아두면 썩어 냄새가 심하다. 동네 소형 약국의 경우 관리가 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조례에는 ‘분기별 1회 이상’, ‘월 1회 이상’ 수거한다고 명시했지만 정확히 언제 어떤 방식으로 수거하는지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조례가 애매해 임의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약국에서 폐의약품을 수거하더라도 관할 지자체가 이 문제에 소홀한 경우가 많아 부담이 크다"고 토로했다.
생태계 교란 등 초래...건강에도 악영향
폐의약품은 일반 쓰레기나 하수도에 버려질 경우 토양, 수질 오염을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작년 12월 발표한 ‘폐의약품 안전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폐의약품이 버려질 경우 생태계 교란과 슈퍼박테리아로도 불리는 ‘다제내성균(다양한 항생제에 대해 내성을 가진 병균)’의 확산을 초래할 수 있다.
이외에도 피임약 성분이 호수에 노출된 후 물고기가 정상적으로 번식하지 못해 멸종했고, 항불안제가 어류의 행동 변화를 초래한 결과 등 오염된 의약물질이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연구결과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약국이 폐의약품을 수거토록 한 것은 국민들의 약물 오남용을 예방하려는 취지"라면서도 "폐의약품 수거 및 처리에 대한 약국의 애로사항은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기적으로 수거해 소각하는 지자체의 역할을 명확하게 하는 등의 더 나은 폐의약품 수거 및 처리 대책을 수립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스냅타임 권보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