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록의 여행] 일본과 고하도의 질긴 악연의 비밀

by강경록 기자
2020.06.26 06:00:01

목포의 방파제이자 파수꾼인 '고하도'
2012년 개통한 목포대교로 육지가 돼
일제강점기, 국내 최초 육지면 재배 시작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 머물기도

목포해상케이블카를 타고 바라본 고하도의 모습. 섬 모양이 ‘용’을 닮았다고 해서 ‘용섬’이라고도 불린다. 판옥선전망대 너머로 해안데크길과 목포대교, 그리고 신안의 섬들이 보인다.


[목포=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전남 목포는 수많은 시간을 품은 도시다. 원도심에 있는 수많은 일제 강점기 근대 건축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길은 임진왜란 시절 조선에까지 이른다. 이순신 장군의 지략담을 전하는 유달산 노적봉과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을 준비했던 고하도(高下島) 등. 항구도시 목포는 겹겹이 쌓인 시간 속으로 사람들이 오가며 수많은 이야기를 품었다. 올 초 목포는 지역관광거점도시로 선정됐다. 내륙과 다도해 2000여개 섬들을 이어주는 허브도시가 바로 목포여서다. 또 대양과 대륙을 이어주는 통로다. 호남선의 종착지이면서, 끊어진 남북 철도가 다시 이어지면 유라시아 대륙횡단의 출발지가 바로 목포다.

목포 고하도 바다 사이를 건너가고 있는 목포해상케이블카


◇목포대교로 육지가 된 섬 ‘고하도’

이번에 소개하는 곳은 목포의 부속섬, 고하도(高下島)다. 고하도는 목포항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목포항에서 약 2km 지점에 있다. 목포항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섬이다. 여기에 서남해에서 배를 타고 내륙의 영산포까지 연결하는 영산강의 관문 역할을 한다. 목포 사람들은 흔히 ‘용섬’이라 부르는 섬. 섬 모양이 풍수지리적으로 용(뱀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2012년 개통한 목포대교를 통해 쉽게 고하도에 들어갈 수 있다. 양쪽에 다리가 놓이기 전, 고하도 사람들은 ‘바다의 시내버스’라 하는 근해 순회관광선을 타고 뭍을 오갔다. 정기항로인 여객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또 다른 방법은 지난해 9월 개통한 목포해양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것이다. 북항~유달산~고하도로 이어진 이 케이블카는 국내 최장인 3.23km에 달한다. 특히 바다 위 150m가 넘는 높이에서 목포의 진산인 유달산 등 숨겨진 비경을 볼 수 있어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삼학도 크루즈에서 바라본 고하도와 목포 대교의 야경


목포 북항에서 차를 타고 목포대교를 건너 고하도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나지막한 언덕이 나타난다. 이곳이 예전에는 섬이었는데, 지금은 주변을 막아 고하도와 하나가 됐다. 이 섬이 바로 ‘장구섬’이다. 섬의 모양이 장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장구섬을 지나면 작은 마을이 있다. 고하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원마을, 고하리다. 4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적막했던 이 마을이 최근 활기를 찾고 있다. 목포시가 고하도 개발에 발벗고 나서면서부터다. 지난해에는 목포해상케이블카가 개통했고, 올해는 목화체험장도 개장한다.

목포해상케이블카를 타고 바다 건너편 고하도로 가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한을 품은 고하도

일제강점기였던 약 100년 전. 당시 목포항은 부산, 인천과 함께 전국 3대항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 배경에는 역사적인 장소, 고하도가 있었다. 일제는 고하도에 목화밭을 조성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육지면을 재배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고하도 선착장에는 ‘조선육지면발상지비’(朝鮮陸地綿發祥之碑)가 있다. 이 비에는 ‘1904년에 고하도에서 처음으로 육지면 재배를 시작하였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육지면은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이 들여온 재래면과는 다른 종이다. 원산지가 남미로, 따뜻한 곳에 잘 자라는 면화로 미국면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미국산 육지면을 고하도에 시험재배했고, 재배에 성공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졌다. 당시 고하도에서 생산한 면화는 국내 생산량의 30∼40%를 차지할 만큼 번창했다. 이후 목포는 ‘삼백(三白·목화, 소금, 쌀)의 도시’라는 타이틀과 함께 급성장했다. 최근 고하도에 목화체험장도 문을 열었다. 최근 목포시는 고하도에 체험관, 전시관, 테마길 등을 조성해 ‘육지면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가치에 의미를 더하고 있다.

최근에 개장한 고하도 목화체험장




제국주의를 꿈꾸던 일제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일제는 조선의 민간인을 징병해 고하도 해안 곳곳에 진지 동굴을 팠다. 유달산이 바라보이는 해안가에는 당시에 판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 여럿 있다. 동굴에는 단단한 해안 암반을 정과 폭약으로 판 흔적이 남아 있다. 75년 전 이곳에서 일제의 감시하에 정으로 굴을 팠을 선조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이 동굴 진지는 일제가 목포항으로 접근해 들어오는 적선을 공격하기 위한 ‘자살특공대’를 숨겨놓으려 파 놓은 것이다. 고하도 외에도 여수시 삼산면 동도리 해안,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어불도 해안에서도 발견됐다. 조금 다른 형태의 동굴도 있다. 입구는 조그마하지만, 들어가 보니 ‘Y’자형으로 갈라져 제법 길게 파여 있다. 상당히 넓은 공간이다. 아마도 수상특공부대의 지휘본부와 관련된 듯했다. 고하도 진지 동굴은 모두 20여 곳이었지만, 목포대교 건설 도중 상당수가 사라지고 지금은 10여개가 남아 있다. 모두 목포가 바라다보이는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다.

고하도 일본진지에서 바라본 유달산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켰던 파수꾼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킨 섬도 고하도였다.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도 고하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제주도와 울돌목으로 통하는 바닷길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여기에 바닷길과 영산강의 내륙 수로가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고하도가 무너지면 호남의 곡창지대를 일본군한테 고스란히 내줄 수밖에 없다고 봤다. 작은 섬 고하도가 조선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한 셈이다.

이순신 장군은 고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고하도가) 서북풍을 막아주고, 수군의 배를 숨기기에 아주 제격’이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이순신 장군은 완도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겨가기 전까지 108일 동안 이 섬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군량미를 확보하고, 조선 수군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모충각


고하도에는 진의 성터가 남아 있다. 진영이 있는 곳은 불당골, 용오름길의 큰산 아래 부근이다. 칼바위에서 말바위 가는 길에는 성터의 흔적도 남아 있다. 자연적인 바위를 이용하여 쌓은 석성의 형태다. 난중일기에 그 건설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당시 비축된 군량미는 486석에 달했다. 유달산이 보이는 바닷가 해안길을 따라가면 충무공을 기리는 모충각(慕忠閣)이 있다. 군량미가 많게 보이기 위해 쌓았다는 유달산 노적봉을 마주하고 있다.

최근 설치한 용머리 해안데크에도 이순신 장군의 조형물이 있다. 해안데크는 고하도 판옥선전망대에서 용머리까지 해상에 설치한 연장 약 1km 폭 1.8m의 해안 산책로다. 목포시는 이 산책로 용머리와 중간지점에 넓은 광장 형식의 포토존 2개소를 설치했다. 용머리 포토존에는 높이 4m의 용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중간지점에는 4m 높이의 이순신 장군 조형물을 설치했다.

목포 대반동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고하도와 목포대교


◇여행메모

△잠잘곳= 목포의 하당신도시에 호텔들이 몰려 있다. 상그리아 비치호텔, 폰타나비치관광호텔, 유토피아가족호텔, 샤르망호텔, 시월애호텔 등이 있다. 유달산 아래 유달유원지 부근의 신안비치호텔도 오래되긴 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먹을곳= 온금동의 선경준치횟집은 준치회비빔밥과 아귀탕이 별미다. 특히 가시가 많은 준치를 잘게 썰어서 채소와 고추장에 무치고 밥을 넣어 쓱쓱 비벼 먹는다. 조기구이·갈치구이·병어찜 등 구이·찜류와 마른우럭맑은탕 등도 낸다. 하당로에 있는 명인집은 간장게장 정식이 유명하다.

선경준치횟집의 병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