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스타들의 ‘이유 있는 외도’

by김미경 기자
2017.11.13 06:45:55

예능 경합, 영화 주연…클래식 형형색색 다가오네
소프라노 임선혜 ‘더 마스터’ 1회 우승
피아니스트 김선욱 ‘황제’로 영화 데뷔
바리톤 고성현도 주말드라마서 열연
공연장 밖 관객들과 소통 접점 부족
TV·스크린 통해 대중적 인지도 넓혀
‘클래식=어렵다’ 편견 맞서 저변 확대

드라마 ‘아버님 제가 모실게요’에 조연으로 등장한 바리톤 고성현 한양대 교수(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영화 ‘황제’ 주연을 맡은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마이 리틀텔레비전’에 나와 화제를 모은 리코디스트 염은초.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국내 클래식 공연장을 찾는 관객 수는 한 회 공연에 최대 2300명(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기준) 정도다. 스타 연주자나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 등이 출연해 객석이 꽉 찰 때 얘기다. 대부분 클래식 연주회엔 빈자리를 쉽게 볼 수 있다. 음악계에 따르면 초대 인원을 제외하면 절반이 차지 않을 때도 많다. 한국이 음악콩쿠르 최대 강국이라고 하지만 대중에게 클래식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한국의 유명 음악가들이 클래식 저변 확대에 팔을 걷어부쳤다. ‘클래식은 무겁고 어렵다’는 편견에 맞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정통 클래식만 고집해왔던 과거와 다르다. TV드라마부터 예능·영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소프라노 임선혜, 바리톤 고성현·김주택, 베이스 손혜수, 피아니스트 김선욱, 리코디스트 염은초, 비올리스트 이승원 등. 클래식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들이 앞장섰다. 값비싼 티켓을 내고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연주자들을 대중매체에서 보다 허물없이 접할 수 있게 된 셈이다.

10일 첫 방송한 예능프로그램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 1차 경연에서 우승한 소프라노 임선혜(사진=EA&C).
지난 10일 첫 방송한 엠넷(Mnet) TV예능프로그램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이하 더 마스터)에는 클래식 애호가들의 눈에 친숙한 인물이 등장한다. ‘아시아 종달새’로 불리는 소프라노 임선혜다. 클래식·공연밴드·대중가요·국악·재즈·뮤지컬 등 각 장르를 대표하는 6인의 마스터들이 매회 차마다 경연을 벌이는 프로그램이다. 이날 임선혜는 ‘울게 하소서’를 열창해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 그가 최고의 자리에서 TV예능을 택한 이유는 뭘까.

임선혜(41)는 “이번 출연으로 감히 ‘클래식의 대중화’를 섣불리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또 많은 이들의 염려와 걱정도 모르지 않는다”며 “클래식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정한 만큼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29)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배우’로 깜짝 데뷔했다. 이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한 ‘황제’(감독 민병훈·이상훈)에서 피아니스트 역으로 출연했다. 대사 없이 연주하거나 걷는 모습만 찍었다. 본업(本業)에 충실했던 셈이다. 치유라는 이 영화의 키워드가 맞아떨어져 출연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5월 종영한 공중파 주말드라마 ‘아버님 제가 모실게요’에는 바리톤 고성현 한양대 교수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고 교수는 테너 유슬기·백인태, 베이스 바리톤 권서경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카메오가 아닌 조연으로 등장해 그의 무대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줬다.

지난해 11월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게스트로 나온 리코더 연주자 염은초 역시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국내 몇 안 되는 리코디스트인 그는 당시 걸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정은지와 출연해 각종 리코더를 이용한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왼쪽)과 비올리스트 이승원(사진=빈체로·목프로덕션).
이 밖에 국내 대표 현악사중주단 노부스콰르텟의 멤버인 비올리스트 이승원은 지난해 케이블 예능프로그램 ‘문제적 남자’에 출연해 재치 있는 입담과 연주를 뽐내며 팬덤을 늘렸다. 23살에 비올라로 ‘독일 박사학위’를 받은 음악 영재, ‘IQ162의 수학 천재’란 스펙이 전파를 탄 뒤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 1위에 올랐다.

이승원은 출연 계기에 대해 “보통 예능 프로그램에서 섭외 제의가 들어왔다면 거절했을 것”이라며 “문제적 남자의 경우 다양한 분야의 게스트를 섭외하고 정체성을 잃지 않은 선에서 클래식 음악을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주위 반응을 묻자 “실시간 검색순위 1위에 오르는 등 그만큼 방송 효과가 크구나라고 느낀 동시에 신기했다”며 “마주치는 음악 친구들마다 방송 재미있게 잘 봤다고 칭찬해줘 좀 쑥스러웠다. 콰르텟 멤버들도 촬영 날까지 우려와 걱정을 많이 했는데 방송 뒤 좋은 반응에 마음을 놨다”고 귀띔했다. 다시 예능 출연 제의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하자 “음악가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 전제 조건이 성립된다면 조심스럽게 고민할 것 같다”고 웃었다.

포문은 ‘팬텀싱어’가 열었다. 지난해 11월 첫 방송한 ‘팬텀싱어’는 JTBC 크로스오버 노래경연 프로그램이다. 심사위원으로 활약 중인 손혜수를 비롯해 테너 백인태·유슬기·이동신, 베이스바리톤 권서경, 바리톤 김주택 등은 대중적 지명도를 얻었다.

클래식 스타들의 이러한 ‘외도’는 갈수록 줄어드는 클래식 인구를 늘리고 젊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동안 일반 대중이 클래식을 접하려면 KBS 열린음악회 등 한정된 프로그램이나 장소에서만 들을 수 있었다면 놀라운 변화다.

베이스 손혜수
실제로 티켓 판매에서도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공연기획사 한 관계자는 “클래식 음악회를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사람들이 TV 프로그램을 보고는 ‘실제 공연장에 꼭 한번 가보겠다’는 반응을 보이더라”며 “팬텀싱어 출연진으로 구성된 팀의 공연은 5분 만에 동나는 등 암표까지 성행한다”고 했다. 이어 “많은 연주자가 생계 때문에 음악을 포기하거나 결혼식 연주, 레슨 등 단기 일자리에 매달리는데 어느 정도 설 자리가 생겨났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봤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잘 활용하는 중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랑랑 역시 “클래식 연주자도 영화배우나 스포츠 스타들처럼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대중은 좀처럼 클래식음악에 대한 정수를 제대로 느낄 기회가 없었다. 그런 기회의 접점을 늘리고, 만날 길목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환영한다”고 했다. 다만 대중적 인지도와 연주자로서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중 활동에 지나치게 무게가 실릴 경우 자칫 ‘집토끼’를 놓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류 평론가는 “우리나라의 예능화는 정도가 심하다.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그는 “TV ‘알뜰신잡’ 역시 예능 없이 인문학을 대중에 전달하기 힘들다는 강박이 내비친다. 사회의 다원성 한계와도 맞닿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칭찬이든, 논란이든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대중의 클래식화는 이제 시작이다. 판단할 시점이 아니다.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비올리스트 이승원이 ‘문제적 남자’에 출연했을 당시 TV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