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가 만났습니다]①이사회가 제역할 해야…`현대차·KB금융 이사회 모범`

by최정희 기자
2019.07.17 05:30:00

박유경 APG 아시아·태평양 지배구조 대표
"이사회, 권한은 많은데 제대로 작동 안 해"
이재용·최태원 `이사회 중심 경영` 선언.."잘한 일"
지배구조 문제는 포스코·KT&G 등 주인 없는 회사가 더 커

[사진=이데일리 김태형 기자] 박유경 네덜란드 연기금 운용공사(APG) 아시아·태평양 지배구조 대표


[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한국 기업은 글로벌 기업이고, 글로벌 기업은 글로벌 스탠다드가 있다. (그 기준으로 볼 때) 한국 기업에게 부족한 부분의 핵심이 이사회다.”

2009년부터 10년간 국내 기업에 투자, 기업 경영 활동에 주주로서 목소리를 높여왔던 박유경 네덜란드 연기금 운용공사(APG) 아시아·태평양 지배구조 대표는 11일 서울 소공동 플라자호텔에서 이데일리와 만나 “기업들이 예전보다 투자자들의 인게이지먼트(적극적인 주주 활동, engagement) 활동에 전향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이사회’를 꼽았다. 권한이 집중돼 있는 데 비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그나마 이사회가 잘 작동되고 있는 기업으론 현대차(005380), KB금융(105560)지주를 꼽았다.

행동주의 펀드인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KCGI)의 타깃이 된 한진(002320)그룹에 대해선 “지금까지 이런 기업은 본 적이 없다”며 한진그룹이 삼성전자(005930)나 현대차처럼 마음을 열고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표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한국에 올 정도로 한국을 자주 찾는다. 한국에 투자한 기업들을 관리하는 것 외에도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바람을 타고 각종 공청회, 토론회 주요 연사로 초청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 기업과 투자 문화 등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쓴소리를 뱉어낼 수 있는 유일한 인사로 꼽힌다. 박 대표는 베어링증권, 샐러먼스미스바니증권 등에서 10년 이상 애널리스트로 일하면서 기업 지배구조에 관심을 가졌고 2009년 APG에 합류했다.

박 대표는 “연기금이 사회, 경제, 환경, 인권 등에 좋은 영향을 주도록 활동하면서도 돈까지 받을 수 있다니 처음엔 깜짝 놀랐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월급을 받으면서도 공익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일자리란 얘기다. 10년간 국내 기업들의 의사결정 체제, 주주를 대하는 자세를 지켜봤던 그는 아쉬움과 긍정적인 면을 모두 제시했다. 아쉬운 부분으론 ‘이사회’를 꼽았다.

박 대표는 “우리나라 지배구조 문제의 핵심은 이사회 권한이 엄청 큰데 이사회가 잘 안 돌아간다는 것에 있다”며 “상법에 의하면 이사회를 통해 기업의 모든 액션이 취해지는데 이사회 구성원의 전문성이나 독립성이 부족하거나 그런 것들을 할 수 있게끔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 것이다. 이사회가 잘 안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기업들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30분 만에 몇 조원의 투자가 의결되는 일도 있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이사회가 주주들을 대신해서 많은 것들을 결정하는데 이사회가 잘 안 돌아가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주주의 모든 꿈과 야망을 이사회가 현실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 이사회가 경영진을 뽑아야 하는데 거꾸로 경영진이 이사회 구성원을 뽑는 구조로 돼 있다”고 말했다. 통상 경영진이 사외이사, 사내이사를 추천하고 이들이 대부분 주주총회에서 통과돼 이사회 구성원이 되는데 이사회가 경영진을 선택하는 구조가 돼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경영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없어져야 할 말”이라며 “경영진은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이사회가 잘 안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대규모 투자 결정은 주주총회에서 하도록 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박 대표는 “홍콩, 중국, 인도 등에선 회사채 발행, 투자 등을 주주총회에서 결정한다”며 “우리나라도 자산규모의 20% 이상의 투자 건에 대해선 주총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박 대표는 국내 기업들이 주주를 대하는 태도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박 대표는 “주주 활동에 대해 과거엔 왜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회장이 알아서 어련히 잘 하지 않겠냐는 식이었는데 이제는 주주 활동이 지배구조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차를 사례로 들었다. 그는 “예전엔 외국인 이사를 상상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현대차가 이사회 구성원도 가장 선진적이고 다양하다”고 말했다. 현대차 이사회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 정의선 부회장 등 지배주주가 있지만 알버트 비어만(Albert Biermann) 현대차 사장, 유진 오 캐피탈 인터내셔널 파트너, 윤치원 UBS 부회장 등 연구개발(R&D), 금융전문가 등으로 구성돼 있다. KB금융(105560)은 아시아 내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이사회라고 평가했다. 박 대표는 “윤종규 회장이 오고 나서 이사회가 많이 안정됐고 이사회가 경영 철학을 구현하는데 기준점이 되고 있다”며 “1년에 한 번씩 이사회와 주주들이 만나는 간담회를 하는데 모든 이사들이 오고 주주와의 소통에도 굉장히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이 ‘이사회 중심 경영’을 선언한 것에 대해서도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삼성, SK, LG는 이사회 독립성과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했다. 박 대표는 “여태까진 한 사람의 결단, 용기, 신화가 모든 것을 해왔지만 이제 규모가 커지고 과학, 기술 변화가 빨라져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된다”며 “과거엔 똑똑한 형이 동생을 이끌어 4형제가 잘 사는 구조였다면 이젠 (그 동생들의 숫자가) 1만 명이라 아무리 똑똑한 형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KCGI의 주주 활동에 대한 한진그룹의 대응에 대해선 강력 비판했다. ‘자기 성찰’이란 단어를 수 차례 반복했다. 박 대표는 “(많은 주주 활동을 해왔지만) 이 정도의 리액션이 나오는 건 처음 본다”며 “경영진 가족의 성찰 정도가 제로”라고 지적했다. 국내 기업 대부분이 한진그룹처럼 행동하진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는 “기업을 3대째 운영하면 그 가족이 자기 성찰을 해보고 우리 기업이 사회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 사회에 기여를 하는지, 짐이 되는지를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며 “한진이 삼성, 현대가 간 길을 가면 좋을 듯 하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행동주의 펀드들도 다른 주주들의 찬성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 없이 자기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KCGI는 대주주 일가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한진칼의 이익을 좌우하는 주력 자회사 대한항공(003490)의 신용등급이 3년 만에 A에서 BBB로 떨어지고 부채비율이 700%대로 치솟았다며 적자인 호텔 사업 등의 매각을 권고했으나 대주주 측은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박 대표는 재벌만이 문제는 아니라고 꼬집었다. 투자자로서 주주 활동이 더 어려운 회사는 포스코(005490), KT&G(033780), KT(030200), 한국전력(015760) 등 주인이 없는 회사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배주주가 없는 회사의 지배구조는 더 안 좋다”며 “회사 임원들이 3년 일하고 나가니까 장기 비전도 없고 책임도 안 지는 구조이고, 이사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주주 활동을 하려면 누구를 만나야 할지 몰라 한숨부터 나온다. 결국엔 이들 기업은 단기 투자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